나쁜 사회제도의 가장 큰 원인은 그릇된 신앙이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자기 속의 불합리한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이끌어가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생활의 불합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외면하지 말 것. 둘째, 다가올 미래 사회의 합리성에 대해 지극히 순수한 이념을 가질 것. 사회제도는 불합리와 거기서 생길 수밖에 없는 비참함을 생각할 때, 그것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는 반면, 합리적인 생활의 가능성을 뚜렷이 의식할 때는, 자연히 그것을 향해 정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불합리에서 생기는 병폐를 숨기지 말고 합리적인 생활의 행복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모든 인류의 스승이 해야 할 임무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항상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바꿀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 선입견을 버리고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사물을 판단해야 한다. 바람의 방향도 살피지 않고 언제나 똑같이 돛을 올리는 사공은 절대로 목적한 항구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헨리 조지) 사람들이 지금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떠
프랑스 낭만파 음악의 거장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사랑에 눈이 멀어 살인자가 될 뻔했다. 약혼녀 마리 모케(Marie Moke)와 피아노 제조업자 카미유 플레옐의 염문설이 돌자 이들을 죽이려 했다. 꿈에 그리던 로마상. 다섯 번의 도전 끝에 결국 쟁취했다. 로마의 빌라 메디시스에 도착한 그. 낯선 곳에서 마리-모케의 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안달이 난 베를리오즈. 그때 마침 장모가 될 ‘하마’로부터 편지가 왔다. 마리와의 파혼을 알리며 그녀가 피아노 회사 플레엘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절망에 빠진 베를리오즈. 곧 분노로 치달아 살인극을 꿈꿨다. 1803년 12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라코트생탕드레(La Cote-Saint-Andre)에서 태어난 그. 아버지 루이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 내놓으라하는 의사였다. 루이는 아들이 자기와 같은 길을 가길 바랐다. 엑토르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 채 파리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실습 도중 냅다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수술실 한 귀퉁이서 쥐들이 모여 사람 척수를 정신없이 갉아먹고 있는 장면을 보고 구역질이 났기
‘우리’는 모호합니다. 꼼꼼히 따져볼수록 복잡합니다. ‘나’와 ‘너’처럼 절대적일 수 없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수학교과서에 등장하는 집합 같다고나 할까요. 교집합이거나 합집합일 수 있는, 그러니까 ‘A∩B’ 혹은 ‘A∪B’인 것이 ‘우리’입니다. 겹쳐진 두 개의 동그라미에 표시된 빗금일 수도 있고, 중괄호 속에 나열된 원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숫자나 기호로 표시된 ‘우리’는 생명이 없어서 어떻게 묶여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정작 쓰리고 아린 ‘우리’는 사람 사는 영역에 있습니다. SKY이든 강남이든 연봉이든 무엇이든, 끼리끼리 교집합으로 묶인 ‘우리’ 속에서 차별과 박탈의 상처가 자라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호령하던 ‘우리’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패거리였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서 계급장에 붙일 수도 있는 그들에게 불가능이란 없었습니다. 남진이 부른 노래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복집을’ 짓는 사건도 저질렀습니다. 시절은 바뀌었지만 세상을 주무르는 ‘우리’는 여전합니다. 여전한 힘과 권력의 ‘우리’는 여의도와 SKY에만 있지 않습니다. 눈에 도
얼마 전 북한무인기 침투 관련한 TV토론을 본 적이 있다. 참여한 국회의원들의 논쟁을 보면서 아쉬움을 크게 느꼈었다. 한편은 우리의 송골매 무인기 북한 침투는 비례성의 원칙에 입각한 단호한 조치이고 나아가 UN헌장 상의 자위권까지 언급하며 북한의 무모한 도발행위를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은 우리의 지나친 대응과 북한의 또 다른 도발, 우리의 맞대응, 한반도 불안이 가속화되는 상황을 염려한다. 특히 대통령의 백배 천배의 보복 등 강성 발언은 대통령의 언어가 아니라는 지적 등 나름의 평가를 내놓았다. 그런데 왜 북한이 그런 무모한 행동을 자행했는가에 대한 분석, 특히 지난해의 수십 회의 미사일 발사 도발에 이어 우리 영역에 직접 무인기를 침투시킨 근본 이유에 대한 토론은 전무했다. 또한 정부 일각에서는 나타난 현상만을 가지고 북한의 행태를 비난하며 2018년 9·19 군사합의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명의(名醫)는 병의 근본 원인에 대한 진단과 그에 따른 처방, 특히 원인 제거를 위한 대처방안을 강조한다. 2020년 6월의 개성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지속적으로 대남 강경 모드를 이끌어 가는 북한의 행태에 대한 근본 처방이 시급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사업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신이 우리를 통해 이룩할 사업의 전모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지혜의 법칙을 아는 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보다 못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보다 못하다. (중국 잠언) 나는 괴롭다. 나는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내가 신을 섬겨야 하는 것이지 신이 나를 섬겨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를 깨닫는다면 괴로움은 절로 가벼워질 것이다. 이 지상과 천상 사이에 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주거가 영원히 악과 이기주의와 압박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상은 단순한 속죄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곳이다. 그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갈망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 (주세페 마치니) 인생의 목적을 단순히 일신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견디기 어려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색에 의하여 얻어진 것만이 참된 지식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진정한 인식은 시작된다. 어떤 것을 인식하려고 할 때, 그것과 자신의 관계가 학자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발짝도 그 인식에 다가갈 수가 없다.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백지의 상태에서 거기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로) 책에서 읽은 사상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내쫓는 것은, 세익스피어가 당시의 여행자를 비난하여 말했듯이, 남의 땅이 보고 싶어서 자신의 땅을 팔아치우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항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남이 그것에 대해 쓴 책을 읽는 것도 유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타인의 견해와 타인의 태도가 그 사람의 머리속에 끼어들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에게는, 나태하고 무관심해서 스스로 노력하여 사색하기보다는 기존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끝내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독자적인 사상을 지닌 학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쇼펜하우어) 사람의 두뇌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배우는 것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