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년 전 필자가 철도노조에서 전임자로 일할 때였다. 그 당시만 해도 거대한 중량물이 고속으로 내달리는 철도현장은 한 해에 20~30명의 순직자가 발생하던 살벌한 현장이었다. 철도노조 산업안전국장을 역임한 2002년 석달 남짓 동안 나는 순직조합원 장례식에 8번이나 찾아가야 했다. 처절했다. 선로를 보수하던 조합원이 열차에 치이고, 열차를 떼고 붙이던 조합원은 끼이고,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숨지는 사고가 잇따랐다. 철도노조를 100년만에 민주노조로 바꾸고 의욕에 넘쳐 밤낮없이 일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만 있었을리 없다. 서울역사를 검은 천으로 뒤덮고 “죽지않고 일할 권리”를 요구했다. 그때 철도노조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가 현재 고용노동부를 맡고 있는 김영훈장관이다. 우리는 절절한 심정으로 순직사고에 매달렸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만치 김영훈장관이 취임 초기부터 산업재해 현장을 찾으며 산재예방에 전력을 다하는 것을 박수를 보낸다. 그가 산업재해 사망사고 만큼은 뚜렷이 감소시켰다는 족적을 남기기를 응원하는 마음이 크다. 그러나 참 안타깝게도 갖은 대책을 수립하고 감독을 강화하는데도 산업재해 사망자 숫자는 최근 다시 늘어나고 있다. 더구나 얼마전 청도역 인근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의 중령계급이었다. 비교적 낮은 계급이었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나치 수뇌부를 재판한 뉘른베르크 법정에 반드시 서 있어야 할 인물이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유태인학살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추진한 실무 책임자였기에 반드시 심판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치가 점령한 지역마다 수거(?)된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집단 거주지인 게토에서 생활하다가 유럽 전역에 있었던 아우슈비츠 같은 유태인수용소로 이송되어 차례대로 가스실에 들어가 학살되었다. 이때 아이히만은 가장 빠른 시간내에, 가장 적합한 수용소로 그들을 이송하는 열차 시간표를 작성해 유대인에게는 누구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전후 당연히 체포되었어야 할 그는 사라져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이름과 신분을 속이고 15년을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정보력과 끈질김으로 무장한 이스라엘판 국정원이 모사드에 걸려 1960년 체포 납치되어 이스라엘의 전범 재판에 넘겨졌다. 마침 히틀러를 피해 미국에 망명해 연구 생활을 하던 독일 출신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잡지사 뉴요커에서 법정 취재기를 청탁받고 이스라엘로 날아갔다. 아이히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렌트
기술의 발전은 늘 인간의 노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왔다. 농업 혁명은 사냥꾼을 농부로, 산업 혁명은 장인을 공장 노동자로 변화시켰다. 이제 인공지능(AI) 시대는 우리를 또 다른 전환점으로 데려다놓고 있다. 단순 반복적인 작업에서부터 복잡한 인지와 판단 영역까지 AI가 담당하게 되면서, 우리는 ‘노동’ 그 자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과거에는 시간과 노력, 생산량으로 노동을 측정했지만,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지금, 인간의 가치는 더 이상 단순히 ‘일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사회적 의미는 무엇에 기여하는가에서 비롯된다. 전통적 노동 개념은 ‘몇 시간 일했는가’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라는 기준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이러한 기준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반복적 업무와 계산적 판단은 기계가 담당하고, 인간은 그 위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방향을 설정하며 관계를 형성하는 역할로 이동한다. 따라서 기여 중심의 패러다임은 노동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시간 단위 임금에서 성과와 영향력 중심의 보상으로, 단순 기술 숙련에서 창의성과 공감 능력, 복합적 문제 해결 역량으로, 업무량에서…
지난 6월 20일, 이재명 대통령은 농림축산식품부 신임 차관에 강형석 농업혁신정책실장을 지명했다. 연합뉴스는 ‘농업·농촌 전 분야 정책 경험이 풍부하고 현상 분석과 대책 수립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대부분 언론은 농식품부의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면서 농업 현장에 대한 높은 이해와 전문성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지속가능한 농산어촌' 구축이라는 대통령의 공약을 실천할 적임자라는 대통령실 강유정 대변인의 발표 내용도 빼놓지 않고 보도했다. 일부 언론은 혁신적인 정책통이라고 치켜세웠다. 반년이 지난 12월 8일. 서울신문은 “관가를 뒤흔드는 ‘투서 포비아’···농림차관 경질 뒷말 무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대통령이 3일 전 강 차관을 전격 면직하자 공직사회가 술렁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언론보도를 시간대별로 추적해 보면, 그 보도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한눈에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서울신문은 강 전 차관 면직에 대해 다른 언론보다 다각도로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였지만, 기사는 저널리즘 윈칙을 크게 벗어났다. 무엇보다 기사 내용은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한다. 관가의 분위기보다는 그가 왜 새 정
여덟 살일까요, 아홉 살일까요. 책가방을 등에 멘 사내아이가 무인카페 안으로 들어옵니다. 잠시 둘러보더니 자판기에 카드를 밀어 넣습니다. 그러곤 버튼을 눌러 메뉴를 선택합니다. 계산을 마친 자판기가 카드를 뱉어냅니다. 뱉어낸 카드를 아이가 갈무리합니다. 아이의 눈길이 다시 자판기로 향합니다. 갸웃거리는 게 무언가 망설이는 눈치입니다. 주춤주춤, 아이의 손끝이 자판기 어디론가 향합니다. 아마도 얼음이 든 음료가 먹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버튼을 누르자 자판기에서 얼음이 쏟아집니다. 먼저 컵을 놓고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걸 아이는 몰랐습니다. 손바닥으로 얼음을 받아 보지만 속수무책입니다. 와르르, 밀려 내려온 얼음 알갱이가 가게 바닥에 나뒹굽니다. 놀란 아이의 표정도 함께 나뒹굽니다. 이런 걸 엎친 데 덮친다고 하는 걸까요. 놀리기라도 하듯, 이번엔 음료수가 얼음 위로 쏟아집니다. 종이컵에 담겨야 할 음료수가 철철 쏟아져 가게 바닥을 흥건히 적십니다. 아이는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갑니다. 아이는 떠났지만, 아이의 모습은 가게 안 CCTV에 고스란히 남습니다. 떠났다고 떠난 게 아니듯, 보인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세상은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대로 움직
겨울밤, 손끝이 시려올 때면 프랑스 사람들은 뱅쇼 한 잔을 찾습니다. 레드 와인에 오렌지와 계피, 정향을 넣어 따끈하게 데워 마시는 겨울의 술.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김 오르는 컵을 손에 꼭 쥐고 걷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겨울의 낭만입니다. 하지만 낭만이 꼭 유럽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추위뿐 아니라 마음까지 녹여주는 겨울의 ‘위로주(慰勞酒)’가 있으니까요. 바로 전주를 중심으로 전해 내려온 모주(母酒)입니다. 모주라는 이름은 분명 ‘술’이지만, 실제로는 알코올을 충분히 증발시킨 따뜻한 약차에 가깝습니다. 막걸리에 대추, 생강, 계피, 감초 등 약재를 넣어 오랜 시간 달이면, 도수는 낮아지고 풍미는 더욱 깊어잡나다. 추운 날 한 모금만 마셔도 속이 편안해지고 몸의 긴장이 천천히 풀어지지요. 전주 콩나물국밥집에서 해장술이 아닌 ‘해장 음료’로 모주 한 잔을 내는 풍경이 익숙해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주의 유래에는 따뜻한 이야기가 스며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이름 그대로 ‘어머니의 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 건강이 상했던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막걸리를 오래 끓여 알코올은 줄이고 약재의 효능을 채워 건넸다는
내게 버킷리스트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올라보는 것이다. 케냐와 국경을 접한 아루샤 지역에서 멀지 않은 이 산은 세 개의 주요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고산 트레킹이나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인간이 킬리만자로를 처음 등반 한 것은 1889년. 최고봉인 우후루(Uhuru)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 뷰는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산기슭에는 적도 열대우림이 울창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아프리카의 지붕으로 불리는 이 산은 수백만 년에 걸쳐 전설과 위대한 탐험가들의 모험, 그리고 놀라운 자연 변화를 목격해 왔다. ‘킬리만자로(Kilimanjaro)’는 1860년 채택된 스페인어와 영어, 프랑스어 표기로 현지 사람들은 다르게 부른다. 마아(Maa)어로는 ‘올 도이뇨 오이보르(Ol Doinyo Oibor)’, 그 의미는 ‘하얀 산’이다. 스와힐리어로는 ‘킬리 은자로(Kilima Njaro)’ 즉, ‘빛나는 언덕’이란 뜻이다. 요한 루트비히 크라프 같은 19세기 탐험가들에게 이 산은 ‘화려한 산’ 또는 ‘빛나는 산’과 동의어였다. 킬리만자로에는 흑백 콜로부스 원숭이, 코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꿈이 뭐냐”라고 물었다. 나는 과학자라고 대답했다. 다른 아이들도 과학자, 발명가, 우주비행사, 심지어는 대통령 등등… 선생님은 이번에는 공부 좀 한다는 녀석에게 다가가 “꿈이 뭐냐”라고 물었다. 공부깨나 하는 녀석의 대답이다. “이것저것 하다가 안 되면 선생질이나 해야죠 뭐” 그날 그 녀석은 엉금엉금 기어서 집에 갔다. 시인이네, 책이네, 공부네 하면 별 흥미가 없는 사회 분위기라서 유머라도 한 토막하고 넘어가고자 써본 글발이다. 이희승 씨는 '독서와 인생'이란 글에서 우리나라 사람은 일반적으로 책에 관심이 적은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는 시험 때문이랄까, 울며 겨자 먹기로 교과서를 파고들지만, 일단 졸업이란 영예의 관문을 돌파한 다음에는 대개 책과는 인연이 멀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옛말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서 가시가 돋친다. (一日不讀書 口中生刺)!라는 말이 있지만, 오늘날은 하루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문제 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존 경쟁이 극심한 마당에서는 하루만큼 낙오가 되어, 열패자(劣敗者)의 고배(苦杯)와 비운을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까지 했다.…
역사는 종종 표면적 안정의 뒤편에서 틈이 벌어진다. 18세기 초 절대왕정 체제는 견고해 보였으나, 내부에서는 계몽사상이 기존 질서의 정당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19세기 초 빈 체제는 혁명과 전쟁 끝에 복구된 균형을 자랑했지만, 산업혁명과 민족주의의 확산은 왕정복고의 토대를 흔들었다. 20세기 초 베르사유 체제 역시 전후의 평화를 약속했으나, 그 아래서 자라난 경제 불안과 전체주의는 결국 참혹한 대재앙으로 귀결되었다. 공통된 흐름은 분명하다. 질서의 안정처럼 보였던 시기마다, 실은 다음 세기를 규정할 전환의 동력이 이미 누적되고 있었다. 2020년대도 그 연장선에 놓여 있다. 미·중 간 패권 경쟁은 더 이상 주변적 갈등이 아니라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화를 상징한다. 단일 패권의 시대가 저물며 다극화가 본격화했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조율할 장치가 갖춰져 있지 않다. 민주주의 체제 내부에서도 불신과 양극화가 깊어져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더 이상 자명한 전제일 수 없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20세기적 감각과 기준에 머무른 채 근대적 질서의 연장선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는 듯하다. 경제 영역에서도 균열은 체감된다. 글로벌 공급망은 팬데믹을 계기로 재편되기 시작했고, 세계
최근 지어지는 아파트는 고급스러운 외관을 위해 저층부나 필로티, 주출입구를 화강석이나 대리석 같은 석재로 마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벽석재들은 파손시 추락이나 낙하의 위험이 있어 안전하게 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실무에서는 이를 ‘건식 석재’ 공사라고 하며, 과거에는 돌을 붙일 때 시멘트 반죽을 발라 붙였지만(습식), 최근에는 건물 외벽에 앵커와 철재 프레임을 설치하고 거기에 돌을 걸어 고정하는 ‘건식 공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때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거운 돌판이 흔들리거나 빠지지 않도록, 돌의 측면에 구멍을 뚫고 프레임과 돌을 핀(Pin)으로 꿰어 고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꽂임촉’입니다. 쉽게 말해 셔츠의 단추나 가구의 나사못처럼 돌을 꽉 잡아주는 ‘물리적 잠금장치’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석재 마감 뒤편에서 위험한 ‘날림 공사’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많이 시정되었지만 과거 일부 시공 현장에서는 작업 시간을 줄이기 위해 돌에 구멍을 뚫고 핀을 박는 정석 시공 대신, ‘에폭시(석재용 접착제)’를 사용하여 돌을 프레임에 단순히 붙여버리는 방식을 사용하였고 이러한 시공방법이 하자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최근 하자 소송에서 쟁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