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역난방공사는 지역난방 사용자의 고객설비에 대한 에너지 절감 및 효율 향상을 위해 진행한 '지역난방 에너지 효율향상 대국민 아이디어 공모전' 수상자를 16일 발표했다. 지난 5월 22일부터 6월 30일(금)까지 진행된 이번 공모전은 일반 국민의 참여 확대를 위해 공모분야를 일반분야와 전문분야로 구분해 일반분야는 ‘생활속 에너지 효율향상’, 전문분야는 ‘EERS(에너지공급자효율향상 의무화 제도) 사업 발굴’을 주제로 진행됐다. 총 105건(일반분야 68건, 전문분야 37건)의 국민 아이디어가 접수됐으며, 전문가 심사를 거쳐 분야별 각 6건의 아이디어를 최종 선정해 참가상 포함 총 507만 원의 상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전문분야 최우수상(절감으뜸상)은 열소비 상위 5%세대에 진단서비스를 제공해 열사용량을 줄이자는 아이디어로 열 과다사용 세대의 에너지 절감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되며, 우수상(고효율상)은 ▲흡수식냉동기 운전 최적화 아이디어, ▲흡수식냉동기 세관 지원사업이 선정됐다. 전문분야 수상작은 사용자측 에너지 절감과 효율향상을 위한 실증과정을 거쳐 EERS 사업으로 추진하고, 일반분야는 공사 홍보채널을 통한 대국민 홍보 및 에너지 절약 교육자료로 활용할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순국 101주기를 맞았다.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그의 나이 만 열여덟. 앞서 3월 1일 3·1운동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친구들과 서울 학생단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나기도 했다. 4월 1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은 그해 5월 9일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그와 아우내 만세 주역들은 6월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으며, 이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다.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고 동료들을 격려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그렇게 조국의 자주독립을 외치면서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옥중 만세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8일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진 속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인해 콧방울이 주저앉고 퉁퉁 부은 얼굴로 수감번호 371번이 선명히 찍힌 수의를 입은 모습이다
“91년 5월 투쟁은 6월 항쟁을 넘어선 5월 민주화 투쟁으로 불러야 한다”라는 주장이 나왔다. 송병헌 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대표전문위원은 28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91년 5월 민주화운동 30주년 의미와 과제’ 세미나 세션 1에서 ‘91년 5월 투쟁의 민주변혁적 성격과 한국 민주화운동사적 의미’에 대해 주제발표를 하며 이 같은 의견을 냈다. 송병현 전문위원은 발표에서 “91년 5월 투쟁의 ‘비극적 인식’은 호칭, 트라우마, 패배라고 보는 패배담론 등에 따른 것”이라며 “민주, 민중이라는 수식어가 없어 의미가 덜 부각됐다. 또 죽음, 분신을 도구화했다는 담론, 유서대필 사건·외대 사건 등에 따른 도덕성 훼손 담론 등이 문제가 됐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독재자를 퇴진시켰다는 1960년 4월 민주혁명이나 직선제 개헌을 성취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과 달리 가시적 성과가 없다는 평을 받으며 잊고 싶은 역사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라며 “그러나 이러한 요인은 5월 투쟁 자체의 실패라기보다는 한국 민주화운동 자체의 제약이다. 5월 투쟁은 6월 항쟁을 넘어선 더 많은 민주화 투쟁으로 불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펼쳐진 관련 토론은 김형
봄비가 적시고 간 5월의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코로나19로 방문객은 비록 줄었지만, 이곳에 잠든 60기의 민주화 운동 관련 희생자 영령은 늘 그 자리에서 조용히 가족과 친구들을 기다린다. 묘역 한 편에서 강경대의 비석을 바라보는 김동민 민주화운동기념공원사업소장의 눈빛이 슬프다. 김동민 소장은 당시 대학 새내기던 강경대에 대해 “백골단에 맞아 죽었다”라고 했다. 김귀정에는 “대한극장 인근 시위 중 경찰에 짓밟혀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입에 담기 힘든 표현이나 사실이었다. 91년 5월 투쟁으로 꽃처럼 스러진 영혼이 13인이다. 이중 10명은 분신했다. 학생, 노동자 등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촉발은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을 외치다 경찰폭력에 의해 사망한 일이었다.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일이 벌어졌다. 담담히 이를 설명하는 김동민 소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민주화 운동은 한 판 승부가 아니에요. 성과가 없다고, 패배했다고, 결국 제압됐다고 평가절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동민 소장은 ‘5월 투쟁’의 역사적 위상을 하루빨리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5월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