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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의 시시비비] 지도자의 ‘언변(言辯)’

  • 안휘
  • 등록 2020.08.19 06:04:55
  • 16면

 

1995년 지방선거 얘기다. 서울시장 선거 초반 여론조사에서는 민주자유당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꺾고 본선에 올라온 정원식 전 23대 국무총리와 민주당의 조순 후보의 대결은 크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때만 해도 TV토론이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시절이었음에도, 두 후보 간 3회의 맞장 토론이 성사됐다. 명성 높은 경제학자 출신인 조순 후보가 달변가 정원식 후보에게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첫 번째 TV토론이 시작되자 과연 정원식 후보의 수려한 말솜씨가 토론회장을 압도했다. 그러나 두 번째 토론회가 지나가면서 판세는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어눌한 듯한데도 왠지 신뢰감이 더 가는 쪽은 조순 후보 쪽이었다. 세 번째 토론회가 펼쳐질 즈음에는 여론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물론, 선거가 종합적인 전술 전략이 다 총동원되는 게임인 만큼 TV토론만이 변인(變因)이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선거결과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종장과 똑같았다. 민주당 조순 후보의 득표율은 무려 42.35%를 찍었고, 민자당 정원식 후보는 20.67%에 그쳐 33.51%를 얻은 무소속 박찬종 후보에게마저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변은 이후 선거 때마다 지지율이 높은 후보들이 한사코 TV토론을 피하려고 하는 교훈이 됐다. 말 잘하는 후보가 TV토론에서 유리하리라는 공식도 깨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11∼13일 전국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에서 ‘다음 대통령으로 누가 좋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19%, 이낙연 의원은 17%로 집계돼 순위가 뒤집혔다. 여야를 통틀어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면서 ‘대세론’까지 운위되던 이낙연 의원을 이재명 지사가 처음으로 꺾은 것이다.

 

다만, 당심에서는 여전히 이낙연 의원이 리드하고 있다. 갤럽 조사 결과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이낙연 의원(37%)이 이재명 지사(28%)를 크게 앞서 있어 당내 경선에선 아직 이 의원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지사가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이낙연 의원을 제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대법원 재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치고 오르는 이재명 지사에게는 대체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일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메시지의 차이’가 견인하는 ‘이미지의 차별성’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누구나 다 인정하듯이 백전노장 이낙연 의원의 화법은 대단히 세련돼 있다. 과격하지도 넘치지도 않으면서 할 말은 다 하는 고도의 화술이 동원된다. 언제 어느 때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응대하는 이 의원의 화법은 늘 감탄스럽다.

 

반면에 이재명 지사의 화법은 투박하지만 간단명료한 것이 특징이다. 좀처럼 중의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 그의 발언은 내용이 명쾌하게 와 닿는다는 장점이 있다. 코로나19, 남북교류의 교착, 부동산 혼란 등 절체절명의 시대 상황 속에서 메시지가 분명한 이재명 지사의 언행은 문제의 ‘핵심을 뚫어 문제 해결을 할 줄 아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드높여가고 있다. 이재명 지사는 “몇몇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정치를 한다고 착각한다, 다 ‘물 위에 뜬 배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진짜 정치는 국민이 하는 것이고, (정치인은) 그 흐름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면서 “물의 흐름을 거스르면 배 끼리 부딪혀 깨진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당권 경쟁에 나선 이낙연 의원이 어떤 내공을 펼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재명 지사가 뜻을 이루느냐 못하느냐는 간간이 보여주고 있는 진영논리를 벗어난 과감한 ‘실용주의’의 안착 여부에 달려있다. 최근 들려오는 여론의 향배를 가늠해보면 중도 민심까지도 이재명 지사의 바로 그 실용적 용단을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교조적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깊숙이 발 담근 채 매의 눈으로 바른 민심의 줄기를 찾아내는 능력이 끝까지 발휘된다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정성이다. 목소리가 좋다든가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은 약간의 덤일 따름이다. ‘말을 더듬더라도 진실만을 말할 줄 아는’ 지도자를 이 시대는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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