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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열어라 검찰, 내놔라 수사권!

  • 최영
  • 등록 2021.01.22 06:00:00
  • 1면

 


“문화예술·체육인 건전화사업 계획” 이 제목을 보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제목의 단어만 보면 1980년 전두환이 만든 삼청교육대에서나 쓸만한 표현이 아닌가? 왠걸, 이 제목은 2010년 국정원이 만든 활동계획이었다. 이번에 국정원이 시민단체 ‘내놔라 내파일 시민행동’에 공개한 민간인 사찰자료 중 일부를 경기신문이 단독보도한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의 꼼꼼함이라니.. 느닷없이 어느 야당 서울시장 후보의 “독하게 섬세하게”란 구호가 떠올랐다. ‘좌파 연예인의 방송활동 차단 강화, 정부비판 성향 인물 견제 방안 강구’, ‘비리를 적출, 사회적 공분 유도’ 등의 문구를 보면서도 나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아니, 거꾸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이런 짓을 저지를줄 몰랐단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모은 사찰자료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고,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의 밥줄을 끊으려 했다. 사찰이 국가안보를 위해선지 정권의 보위를 위해선지는 구분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에겐 정권이 곧 국가였으니깐 말이다. 그냥 ‘국정원이 국정원했을 뿐’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나는 익숙한 참담함에서 배어나오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아마도 구)동독의 정보기관 슈타지가 전국민의 1/3 정도를 감시했던 그런 세상일 것이다. 하긴 우리도 80년대에 전화기 감이 갑자기 떨어지고 잡음이 끼어들면 전화하다가도 “야 이 새끼들아 잠 좀 자라!”라고 고함치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때는 대국민 녹화사업 수준의 사찰이 당연시 되던 군사정권이었으니 차라리 논외로 하자. 

 

내가 더 안타깝게 여기는 사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의 사찰이라는 시점이다. 김대중·노무현대통령으로 이어진 민주정부 10년이 막 지난 시기였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지나자말자 마치 놓으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고무줄처럼 국정원은 과거로 되돌아가버렸다. 국정원장이 대놓고 “종북좌파 세력들이 국회에 다수 진출하는 등 사회 전분야에서 활개치고 있는 데 대해 우리 모두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들에게 정부비판세력은 바로 좌파이자 종북이었고 국가전복세력이었으며 국민들은 댓글부대를 통한 심리전의 대상이었다. 하다하다 국정원은 서울시 공무원이던 유우성을 간첩으로 만들어내기까지 했으니 역사에서 생산기술은 퇴보하는 법이 없지만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역주행할 수도 있음을 역설적으로 가르켜 준 셈이랄까? 그런 점에서 이번에 굳이 지나간 정보공개를 요청해 사찰자료를 건네받은 까닭은 앞으로 다시는 국정원이 정권안보의 도구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분명히 못박는 의미이다. 과거의 범죄를 드러냄으로서 미래의 또다른 범죄를 경계함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공개된 사찰문건을 보고 노여워하지만은 않겠다. 그것은 이 사안의 핵심을 비껴가는 감정이다. 우리는 광장에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노래불렀다.  비리와 농단으로 점철된 이명박근혜정부 시절, 어둠이 지배한 권력기구를 개혁하는 과정 중에 드러난 민낯일 뿐이다. 무한권력을 휘둘렀던 국정원이 이제 국내정보수집기능을 없애고 대공수사권마저 경찰에 넘기는 목전까지 다다렀다. 아직 충분치 않겠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여정으로 여김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이 대목에서 안타까움을 넘어 슬픔이 밀려온다. 현 정부가 숙명적 과제로 여겼던 권력기구개혁에서 ‘정보와 수사권’을 같이 쥐고 있던 탓에 스스로 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국정원은 겨우 개혁의 문턱을 넘어섰다. 간첩이라도 조작해야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었던 조직에서 개혁은 국정원이 선진정보기관으로 나아갈 동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거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없는 죄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국정원의 권능은 지금 검찰에 있다. 그런데 검찰은 아직 메아리조차 없다.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가진 채 기획수사, 표적수사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하여 나는 소망한다. 국정원 개혁을 지렛대 삼아 문재인정권 임기내에 검찰개혁까지 이어지기를.. 그래서 이번 사찰공개를 이끌었던 시민단체가 외친 ‘열어라 국정원, 내놔라 내파일’을 이렇게 바꿔서 소리지르고 싶다. ‘열어라 검찰, 내놔라 수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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