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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의 인천얘기 14 - 중구 개항동(開港洞)

 인천에 ‘징매이 고개’가 있다. 경명현(景明峴)이다. 공촌동과 계양동을 잇는다. 징 그리고 매, 매를 징발한다는 의미다.

 

사냥을 즐긴 고려 충렬왕이 이곳에 매의 사냥과 사육을 담당했던 관청인 응방(鷹坊)을 설치하고 매를 징발한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계양구 병방동(兵房洞)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세조 때 설치된 군사기지와 관련 있다.

 

강화 정족산성(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이야기로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듯 지명(地名)은 그곳의 역사와 전설, 설화, 인물, 자연,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내력이 갈래져 스며있다.

 

고장의 이름은 그  지역의 정체성과 정신세계를 대표한다. 사람들에겐 아련한 추억이고, 향수이며, 어머니의 품이다. 때론 집단 자부심이요 공동체의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왕조시대 위정자들은 역모나 모반, 강상(綱常)의 질서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면 주모자와 연루자들은 물론 그들과 관련된 지역에도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중종반정이 있기 1년 전인 1505년 연산군은 충청도의 명칭을 충공도(忠公道)로 바꿔버렸다. ‘충추와 청주의 충청’이 하루아침에 ‘충주와 공주의 충공’으로 바뀐 것이다. 자신에게 극간(極諫)을 한 내시 김처선(金處善)의 출신지라 해 그의 고향을 혁파하면서 내린 조치다. 조선시대 내내 이런 일이 적지 않았고, 충청도가 유난히 잦았다.

 

고장의 행정구역상 격을 강등하는 사례도 많았다. 부(府)를 군(郡)으로, 군은 현(縣)으로.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가 일반시, 시가 군이 되는 식이다.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던 세종임금은 온천을 무척 좋아했다. 서울과 가까운 부평에 온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으나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국왕 행차를 수발하는 번거로움 등 때문에 그곳 관리와 아전, 백성들이 사실을 숨긴다고 생각한 세종은 격노해 1438년(세종20) 부평도호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내가 사는 고장의 격(格)은 주민들의 자긍이요 자존이었고, 그에 따라 국가로부터 받는 대우나 지원도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도의 이름이 바뀌고, 고을이 강등되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무수히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인천(仁川)이란 명칭이 탄생한 것은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 10월15일이었다. 이후 600년이 지나도록 인천의 이름은 변화가 없었고 뒤에 붙는 명칭만 군, 부, 도호부(都護府), 감리서(監理署) 등으로 부침이 따랐다. 그 안에 있는 무수한 고을의 이름도 생겨난대로 자연스레 이어져왔다.

 

이렇듯 물 흐르듯 흘러온 인천지명의 역사는 일제시대를 거치며 심각한 왜곡과 뒤틀림, 말살이 가해졌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본격적인 제국주의 전쟁을 앞두고 1936년 후방보급기지인 인천부역을 크게 확장하면서 76개 동명을 일본식 정명(町名)으로 강제 개칭했다. 그 내용을 보면 목적은 뻔했다.

 

13곳을 일본 군함 이름(서구 백석동→운양(雲揚)정, 1875년 조선을 무단 침범했던 군함 운요호)으로 갈아치우는가 하면 중구 전동은 러·일전쟁 때 일본군 병참부 사령관 이름을 따 산근(山根)정이 됐다. 일제는 이밖에도 저희들 편의대로 이름을 난도질해 이리 저리 갖다 붙이거나 내다 버렸다. 우리 정서와는 동떨어진, 아무 의미없는 명칭이 숱하게 탄생했다.

 

당시 인천부로 편입된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에 붙여진 ‘송도정’은 지금도 여전히 쓰이면서 논란거리다. 소나무도 별로 없고, 섬도 아닌 곳에 느닷없이 등장한 송도. 이 역시 청·일,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군함 ‘송도함’-일본 3대 절경 중 하나인 미야기현 마쓰시마(松島)에서 따온-에서 비롯된 것이다.

 

치밀하게 계산된 일제의 창지개명(創地改名)이 이뤄진 지 80여 년, 우리 주변에는 아직 이 때의 잔재가 적지 않이 남아 있다.

 

지난해 7월 동구 작약도(芍藥)의 이름이 물치도(勿淄)도로 바뀌었다. 아니 ‘되찾았다’는 표현이 옳겠다. 이 섬은 조선시대 내내 물치도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화가가 구입한 뒤 1919년경 문헌기록부터 작약도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앞서 2018년에는 남구의 명칭이 미추홀구로 변경됐다. 1968년 인천에 구(區)제가 도입되면서 이렇다할 기준이 없었던 당시, 일본의 사례를 원용해 시 청사가 있던 신포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따라 구 이름을 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 동구도 화도진구로 바꾸려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인천시 중구 북성동과 송월동이 통합되면서 새 동의 이름이 ‘개항동(開港)’으로 정해졌다. 주민 공모를 통해서다. 오는 7월부터 이렇게 불린다. 북성동은 조선 초·중기 이곳에 있었던 북성(北城)이라는 성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전문가들은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제물량영 또는 제물진을 북성으로 본다.

 

이곳은 일제시대인 1914년부터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였던 하나부사의 이름을 따 화방정(花房)으로 불리다가 해방 뒤 북성으로 환원됐다. 송월(松月)동은 오랜 기간 별다른 이름이 없었다. 1903년 만석리였다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식의 ‘송판정’으로 바뀌었고, 해방 뒤 송월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개항동의 탄생 과정에 굳이 일제잔재 청산의 의미까지 붙일 필요까지는 없을듯 하다. 1883년 개항 당시 이 일대는 외국문물의 첫 도착지였고, 청나라 사람들의 집단 주거지였다. 이후 인천역과 인천항, 대성목재 등 공장들이 들어서고 국내 최대 관광지 월미도의 입구로 한동안 활황기도 있었지만 원도심으로 쇠락한 지 오래인 곳이다.

 

안 좋은 상황의 역전이나 보다 나은 운수를 갈망할 때 사람들은 이름을 바꾼다. 이번 통합과 새로운 동이름의 탄생을 계기로 개항동 앞에 제2의 개항물결과 함께 새로운 번영의 길이 활짝 열리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인천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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