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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⑲ 파락호인줄 알았던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파락호 행색으로 일제 눈 속이며 독립운동 한 김용환
상해임시정부 설립에 거금 투척…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딸 김후웅, 존경과 회한 담아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글 남겨
포천 극단 맑은물, 12월 김용환 일대기 그린 연극 선보여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이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는 날, 딸 김후웅은 이같은 내용의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을 남겼다.

 

김용환은 집안 말아먹을 난봉꾼이라는 뜻의 파락호(破落戶)를 수식어로 하는 안동의 실존 인물. 노름과 난봉질로 세간의 온갖 비난을 받았음에도 해방 후 독립운동이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

 

‘신행 때 농 사오라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가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뒤늦게 사실을 알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담아 쓴 딸의 편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를 제목으로 한 연극이 오는 12월 14~15일 이틀간 반월아트홀 소극장에서 시민들과 만난다.

 

 

경기문화재단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선정,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공연을 앞둔 극단 맑은물은 2004년 6월 창단 이후 흥미진진한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를 무대화해 경기북부 시민들에게 감동과 교훈, 재미를 선사하려 한다.

 

이번 연극은 서로군정서의 판독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지시로 상해임시정부 설립을 위해 현재의 화폐가치로 300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을 미련 없이 내놓았던 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다.

 

김용환은 술과 노름으로 자신을 위장해 일경의 눈을 피하고, 밤새 노름판에서 돈을 잃어준 뒤 마지막 큰 판에서 돈이 쌓이면 “새벽 몽둥이야”를 외쳤다. 고함과 함께 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등장해 돈을 쓸어가는데 이들은 김용환의 지시를 따르는 청년들로 챙긴 돈은 상해로 보내졌다.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는 기지와 계략으로 독립운동사의 획을 그은 김용환의 일대기를 빠른 템포의 장면전환과 양식화된 표현 방식, 마치 추리물을 같은 긴장감으로 무대를 꾸민다.

 

딸 후웅 역의 배우 김용선을 비롯해 김용환 역 현승철, 종길 역 손성호, 아들 역 황무영, 며느리역 오보혜, 하시모토 역 전상진, 노석출 역 김장동, 부인 역 최소영 등이 무대에서 호흡을 맞춘다.

 

 

연극은 팔순의 치매노인 후웅이 정부로부터 자신의 아버지 김용환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를 의심하면서 시작된다.

 

혼인을 앞둔 후웅에게 아버지는 신행 때 혼수로 장롱 사갈 돈마저 노름으로 날려 가슴을 숯검댕이로 만들었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평생 가슴앓이를 하고 살아온 후웅이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지난날의 한과 상처를 치유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우천 대표는 작품에 대해 “흔히 독립운동사 또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극은 대게 무겁고 진지하거나 어두운 결말을 통한 비극적 접근으로 가슴 한편이 암울해진다. 독립운동사라는 것이 대게는 약자의 저항이기에 당연할 것”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천편일률적인 독립운동사를 벗어나, 재미와 위트가 철철 넘치는 일제강점기 역사극을 무대에 그림으로써 관객에게 새로운 독립운동사를 제공하고자 한다. 선연들이 가지고 있던 기지와 위트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포천시 소극장 문화를 정착시키고 시민들에게 자연스럽게 문화향유의 수단으로 다가가고자 한다”면서 “오랜 시간 연극과 공연문화에 지조와 열정을 쏟아온 실력 있는 제작진, 배우들과 시민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선사하고자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 파락호였으나 독립운동가였던 김용환은 누구인가

 

앞서 말했듯 파락호는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말하는데 과연 독립운동가의 모습과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싶다.

 

김용환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그의 학맥을 잇는 중책을 맡은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이다. 또 애민 애국의 정신으로 존경을 받던 서산 김홍락의 손자로 향산 이만도의 손녀 이호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학봉가의 종손으로 집안을 지키며, 할아버지의 공을 인정받아 참봉이라는 종9품 벼슬을 얻은 김용환은 난봉꾼 행색일 때도 김참봉으로 불렸다.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1896년 의병활동을 하던 김회락이 학봉 종택에 은신해 있다 잡힌 일에서부터다. 이때 일본군은 김회락을 잡기 위해 학봉 종가를 찾아 그의 사촌인 김흥락을 포박하고 치욕을 보인 뒤 집안을 약탈했다.

 

당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훗날을 도모한 김용환은 이후 20세기 초 조선에 위기가 찾아오자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몸담았다.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퍼져나갔고, 김용환은 의병활동을 창의했던 할아버지 김흥락의 손자답게 1908년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참가했다.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 부대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했다.

 

석주 이상룡은 1911년 안동을 떠나 만주로 향하면서 학교를 후원하고, 의병을 지원하는 일과 착취당하는 백성을 지키는 것을 김용환에게 당부했다.

 

1919년 3월 여러 이들의 뜻이 모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이처럼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해 독립운동자들과 연결돼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던 김용환은 일경에 세 번이나 붙잡혀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제 감시가 삼엄했던 당시, 일경의 눈을 피하려고 술과 노름에 빠져 한량 행세를 하며 살았던 김용환.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집안 말아먹을 한량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도 끝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재산을 상해로 보냈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초저녁부터 노름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큰 판돈을 걸고 베팅하는 특기가 있었다고 한다. 노름판에서 돈을 잃으면 ‘새벽 몽둥이’라고 외쳐 건달들을 불러서 돈을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사실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것처럼 위장해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김용환은 도박으로 전 재산을 잃고 외동딸의 결혼자금도 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딸 후웅이 시댁에서 지원받은 혼수비마저 노름으로 썼다고 알려졌다.

 

 

외동딸에게마저 원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밀리에 부친 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기억된다.

 

1945년 광복 다음 해 여름, 김용환은 59세 나이에 병세가 깊어 위중한 상태에 놓였다. 독립투사 측근인 하중환이 문병을 와 “병이 이렇게 깊은데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 감으실 건가?”라고 하자 김용환은 “선비의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자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라며 끝까지 함구했다.

 

그의 헌신은 3년상이 끝나는 1948년, 하중환의 제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김용환은 1995년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는다. 그의 딸 김후웅은 그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발표했다.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김용환을 기억하며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찾아본 결과, 김용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11년김상태 의진에서 활동한 이래 만주에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했다 하며 활동 내용은 미상이나 3번 피체(남에게 붙잡힘)된 사실이 있고, 1922년 10월경에는 의용단에 입단하여 경북 서기로 임명된 후 경상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과 동지 포섭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된 사실이 확인됨’이라고 쓰여있다.

 

성남시와 성남문화재단이 추진한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김용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내 대표만화가들이 독립과 평화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웹툰으로 재조명하는 프로젝트는 역사를 널리 알리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는 평을 받는다.

 

이 프로젝트로 ‘파락호 김용환’이 탄생했다. 이정현 작가는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이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가 이렇게 어울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종가의 종손으로 가문을 이끄는 삶과 나라 잃은 백성으로 독립을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간, 파락호가 아닌 독립운동가 김용환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독립투사들의 업적과 의의를 기리는 일은 후손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이다. 몰래 독립운동을 하면서 끝까지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독립운동가 김용환을 잊지 않고 기억하길 바란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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