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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당신은 평소 주량이 얼마나 되시나요?

53. 어나더 라운드 - 토마스 빈터베르그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안다. 사람들은 외로워서 술을 마신다는 걸.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사실은 더욱 더 고독해진다는 걸. 그런데 그 단절감의 원인은 결국 인간 존재의 근원과 같은 것이라는 걸. 때문에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혼자라는 고립감에 더욱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걸.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을 영화는 진작 알아 왔던 셈이다. 알코올이란 게 워낙 중독 가능성이 높고 또 그게 매우 위험하다는 걸 영화는 경고 ‘따위’보다는 그 드라마틱한 요소에 집중하는 쪽이었다. 영국 마이크 피기스가 만든 1996년작 ‘리빙 라스베가스’의 벤(니콜라스 케이지)은 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래서 결국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 것을 선택한다. 1962년작 ‘술과 장미의 나날’의 조(잭 레먼)와 크리스틴(리 레믹)도 마찬가지다. 외롭지 않으려고 술을 시작해서, 결국 상대방이 지닌 고독의 심연을 더욱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고 지금 얘기하려는 덴마크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신작 ‘어나더 라운드’가 그렇게나 우울한, 잿빛의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 반대다. 아니 사실은 반대인 척 한다. 하지만 진면목은 꽤나 슬픈 이야기이다. 그런데 꼭 슬프다고 얘기해서는 안 될 작품이다. 결국은 뭔가를 극복해 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삶의 진실, 그 실체를 깨달아 가는, 성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나더 라운드’를 보고 나면 처음엔 술이 한잔 하고 싶어진다. 어찌 보면 꽤 괜찮은 ‘술 영화’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욕구는 금방 가라앉는다. 오히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싶게 만든다. 가슴 속 응어리를 후-하고 내뱉고 싶어진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개인의 상처, 트라우마, 일상의 스트레스가 새삼 각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이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술과 담배보다 사람을 먼저 만나고 싶게 만든다. 얘기를 나누고 상대의 마음을 얻고 앞에 있는 사람, 그 실체를 손으로 만지고 싶게 만든다. 사람들에게는 늘 술과 섹스가 급할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따뜻한 포옹과 달콤한 키스이다. 사람들은 죄, 결핍의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늘 스스로의 욕망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해 헛다리를 짚는다.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해결책을 찾겠다며 급하게 서두르고 그게 결국 모든, 그리고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된다.

 

‘어나더 라운드’의 주인공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이 그렇다. ‘어나더 라운드’는 그래서 비극은 아니지만 비극이고, 비극이지만 비극인 ‘척’하며, 그래서 마침내 비극은 아니게 되지만, 그렇다고 햇살 가득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작품도 아니다.

 

술과 인생을 아는 사람은 안다. 살아간다는 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며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또 결코, 슬픈 결말을 맞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차피 인생이란 슬픔과 괴로움, 기쁨과 즐거움 사이에서의 교묘하고 기이한 줄타기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말 ‘한잔 더’로 해석되는 제목의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술꾼 친구 네 명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 중에서 역사 과목을 가르치는 마르틴(매즈 미켈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두 같은 고등학교 선생인 이들은 이제 갓 마흔이 됐다. 다른 친구들, 톰뮈(토마스 보 라센)와 페테르(라르스 란데), 니콜라이(마그누스밀랑)는 각각 체육과 음악, 심리학 선생들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 다소 다들 겉늙어 보인다. 살아가는 데 지치면 사람들은 늙는다. 먼저 마음이 늙고 그 다음 ‘반드시’ 몸이 늙는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이들 모두는 활력을 잃었다. 매너리즘에 빠졌으며 그래서 늘 일상의 여러 일들에 허덕인다.

 

학생들은, 젊고 어린 애들이라면 어디나 그렇지만, 말을 안 듣는다. 제멋대로들이다. 선생이 가르치는 교육 수준이 이상하거나 엉망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틴은 어느 날 학부모로부터 역사 수업에 이상이 있다, 입시나 진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는다. 공개적인 대책회의까지 열리는데 이건 거의 인민재판 수준이다. 굴욕이다. 마르틴은 더욱더 실의에 빠진다.

 

 

집안에서도 그는 아예 존재감이 없다. 야근 근무가 잦은 아내 아니카(마리아 보네비)는 그를 유령 취급한 지 오래다. 아이들도 아빠가 이제는 있으려니 없으려니 한다. 그가 바깥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당하며 사는지 이들은 별 관심이 없다. 아니 아예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근데 이건 아빠나 남편 책임인가, 아니면 아이들과 아내의 잘못인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언제부터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서로 변화의 모멘텀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일상의 관계가 ‘의무적’으로 가는 순간 삶은 종착역을 향해 가는 기차마냥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견딜 수 없는 지루함과 무의미함에서 허우적댄다.

 

니콜라이의 생일날 간만에 모인 이들 네 친구는 그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는다. 노르웨이 심리학자 판 스코르데루의 연구 결과이다. ‘모든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 그 근거까지 이들 대화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어쨌든 판 스코르데루 박사의 결론은 그래서, ‘인간들 모두 이 결핍된 농도를 유지하고 살아가면 일상이 창의적이고 용감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틴과 친구들은 이 심리학자의 연구를 신뢰해 보기로 한다. 측정기까지 사다 놓고 이들은 매 순간 0.05%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와인 두 세잔이나 위스키 한 잔 정도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들은 활기를 되찾는다. 매 수업이 흥미로움의 연속이 된다. 학생들도 좋아라한다. 수업 내용도 풍부해진다. 알코올로 인해 수다가 늘어나듯이 이들의 일상도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술을 마시면 쉽게 너그러워지듯, 이들은 학생들의 마음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아이들과 가까워지게 된다. 마르틴이 가족 관계를 회복해 가기 시작하는 건 물어보나 마나 한 일이다. 심지어 마르틴은 오랜 섹스리스 관계였던 아내와 따뜻하고 격렬한 잠자리까지 갖게 된다. 아내가 묻는다. “당신 무슨 일 있어?”

 

그러나, 실로 ‘그런데 말입니다’이다. 판 스코르데루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어떤 방식으로 0.05%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유지하느냐이다. 이걸 매 순간 알코올을 주입해야 한다는 건지, 특정 시간만 그렇게 유지하면 된다는 건지, 그건 마치 ‘케바케(case by case)’인 것처럼 보인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결코 0.05%에서 멈추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친구 넷은 점점 더,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술에 중독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은 희극에서 비극으로, 비극에서 희극으로, 그리고 다시 비극으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나더 라운드’는 결코 행복한 영화가 아니다. 행복이란 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 혹은 연구결과의 수치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거나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일종의 깨달음에서 온다. 인간은 어떻게든 쉽게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역설의 행복론과도 같은 영화이다.

 

‘어나더 라운드’는 세상에 대해,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해 관조하게 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자신의 마음속 괴물을 응시해 본 적이 없거나, 응시하기를 피해 왔거나, 그래서 그 심연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상대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당연히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어렵고, 소통불능이 되며, 그래서 결국 단절되고 고립된다. 인간 고독의 근원은 자신 스스로에게 있다. ‘어나더 라운드’가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착지 된다. 사람들은 자각이라는 비싼 비용 없이 쉽게 그 답을 찾으려고만 한다. 인생을 즐기려면 인생을 알아야 한다. 대가 없는 인생은 없는 법이다.

 

평소 술을 얼마나 드시는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혹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 영화를 포기하면 안 될 일이다. 영화를 포기하면 사람을 버리게 되고 사람을 버리면 사랑을 잃는다. 사랑을 잃게 되면 결국 세상을 잃고 끝끝내는 자신을 잃게 된다. 이 영화의 인물들 나이를 주목해야 한다. 끽해야 마흔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다 그럴 때이다. 인생은 바닥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한번쯤 미치고, 한번쯤 ‘막 살아 볼’ 필요도 있다. 인생은 짧다. 술과 장미의 나날, 화양연화의 시기는 더더욱 짧다. 너무 고민하고 상심하지 말지어다. 뭘 또 그렇게까지. 모두들 어나더 라운드 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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