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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70. 부전자전(父傳子傳), 남유용과 남공철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과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은 부자(父子) 사이다.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1698~1773)은 원손(元孫) 시절의 정조(正祖) 임금을 세 살 때부터 무릎에 앉혀 놓고 글을 가르친 스승이다. 정조는 유아시절 부터 놀이를 하면서 항상 신하들과 강학(講學)하는 모습을 흉내냈다. 영조 임금이 "자질을 하늘에서 타고나 바로 교육을 시키기에 좋으니, 경들이 서로 의논하여 보양관(輔養官)을 뽑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에 민우수(閔遇洙)와 남유용(南有容) 두 사람을 보양관으로 삼았다.

 


어느 날 영조(英祖)가 원손을 불러 대답하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남유용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으니, "남유용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영조가 기뻐하면서 "네가 여섯 살에 이미 임금 앞에서는 신하를 이름으로 지칭하는 예를 아는구나"하고, 이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외우게 했는데, 한 글자도 잘못 외우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읽는 소리가 쨍쨍하여 금석(金石)과 같다"하고, 남유용에게 이르기를, "원손의 덕성이 점차 자라나 진보하고 있으니, 이는 종묘사직의 다행이다. 이는 경(卿)의 덕분이다"하며 호랑이 가죽을 내려주면서, "지금 호피(虎皮)를 주는 것은 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묘사직을 위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면서 영조는 이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남유용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항상 화려한 비단 도포를 입고 다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좋은 책은 늘 좋은 비단으로 표장을 하는 것이니, 나는 장차 나의 글을 보호하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진(晉)나라의 학륭(郝隆)이 햇볕에 배를 드러내 놓은 채, ‘뱃속의 책을 말린다’고 한 고사와 같은 뜻이다.

 

 
금릉 남공철(1760~1840)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부인이 잠을 자다가 뜰(庭) 안에서 시신(屍身)을 거두어 후원(後園)에 장사(葬事) 지내는 꿈을 꾸고서 매우 나쁜 꿈이라 여기고는 공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정시(庭試)에 장원(壯元)이 될 것이오" 하였다. 시(屍)는 시(試)와 음이 같고, 장(葬)은 장(壯)과 음이 같고, 원(園)은 원(元)과 음이 같기 때문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남공철은 본관이 의령으로, 1792년 전시(殿試) 급제 후 규장각 직각,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는 등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때 더욱 현달하여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 시대에 문장가로 평판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금릉집(金陵集)’ 등이 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우연히 금릉에 대하여 언급하게 되었는데, 자하가 말하기를, "관상법에 ‘옥같은 얼굴빛에 금성(金聲) 같은 목소리를 갖춘 데다 글씨의 필획이 분명하면서도 예스러운 기풍을 띠고 있을 경우라면, 벼슬은 신하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나이는 상수(上壽)를 누린다’고 했으니,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금릉이 정승에 오르고 기사(耆社)에 들어가는 데에 이르니, 신위의 선견지명에 대하여 여러 번 감탄하였다. 남공철은 해맑은 얼굴에 촌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신선 같았고 80세까지 장수하였다.
 
남유용이 세상을 뜨자 임금이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규장각에서 ‘뇌연집(雷淵集)’을 인쇄해서 올렸는데, 임금이 서문을 지었다. 또 친히 제문을 지었는데, "경이 세상을 떠남에 미치니 내를 건너는 데 다리가 없는 듯하다" 하였고, 제문과 함께 뇌연집 서문을 읽게 하였다.

 

 

남유용의 묘는 예전에 광주군 돌마면이었던 율동공원에 있다. 일반적으로 돌마를 突馬로 쓰지만 남유용의 비석에는 石馬라고 새겨져 있다. 남공철의 묘는 청계산 금토동에 있다. 금릉(金陵)은 곧 금토동을 일컫는 것이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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