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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73. 일자산 둔굴과 여주의 둔촌 이집 유적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27~1387)은 고려 말의 저명한 선비로서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등과 교유했으며,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지조있는 선비였다.
 

 


한 때 관직에도 나아가 활동하였으나,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악정을 비판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광주(廣州)의 향리이던 아버지 이당(李唐)을 업고 하남시와 서울 강동구 사이에 있는 일자산(一字山) 둔굴(遁窟)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고, 영천 북안면 도유리에 사는 친구 천곡 최원도(泉谷 崔元道)의 집에서 피신 생활 중에 아버지가 별세하여 최원도의 배려로 나현(蘿峴)에 장사 지냈으며, 신돈이 역모죄로 수원에 귀양을 갔다가 처형된 후 3년의 피신 생활을 마치고 개경 용수산(龍首山) 아래로 돌아왔다.

 

 
둔촌이 피신한 것이 1368년(공민왕 17) 가을이었고, 신돈이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된 것이 1371년 8월 21일이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둔촌은 도은이 위로의 말을 하며 둔촌의 기상이 당당한 사연을 물으니, "내가 오늘날 경도(京都)에 돌아와서 벗들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흡사 꿈속에 있다가 깨어난 것과 같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으니, 이는 실로 나의 몸이 다시 태어났다고 말할 만하다. 몸은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인데, 내 몸이 지금 다시 태어났으니, 이름만 예전대로 놔두어서야 되겠는가. 나의 이름이 원령(元齡)이었는데, 지금 고쳐서 집(集)이라 하고 자(字)는 호연(浩然)이라고 하려 한다" 하였다.

 

둔촌이 고난을 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같이 연루되어 처벌받을까 몸을 사렸지만, 최원도와 이숭인 두 사람은 둔촌을 적극 보호하고 보살펴 주었다. 둔촌이 "다른 친구들은 딴 사람과 어울려 모두 등을 돌렸는데, 그대만은 나를 돌봐주니 더할 나위 없구나" 하였다.
 
둔촌은 젊을 때 전녹생(田祿生)이 1374년(공민왕 23)에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부임할 때 그의 종사관으로 합포(合浦)에 출진한 적도 있고, 강원도 철원과 천안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 후 둔촌의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지만 곧 벼슬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버리고 난 후에는 주로 여주에서 생활하였고, 말년에는 성남의 금토동에서도 거주하였다. 둔촌의 생활은 왜구를 피해 여주 도미사(道美寺)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이곳에서 독서와 농사를 지으면서 소일하였다.
 


여주에 ‘둔촌(遁村, 屯村)’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효종의 사위인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은 처음에 파주에 장사 지내려다, 터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주 둔촌(遁村)에 있는 관찰사공 원만리(元萬里)의 묘소 앞으로 이장하였다. 원만리의 묘소는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산 11-110번지이고 그 앞에 원몽린의 묘가 있다.
둔촌이 "내가 사는 곳을 둔촌이라고 하였다"고 언급하였을 뿐 아니라, "고달(高達=고달사)의 서쪽 봉우리는 둔촌(遁村)과 가까운데, 산 앞의 오솔길 하나 사립문으로 이어졌네. 만약에 선로(禪老)께서 내려온다면, 날마다 상종하여 웃고 얘기하며 모시겠소"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재 블루헤런 골프장이 있는 부근이다.


현재 이 마을 입구 삼거리에는 ‘屯村洞門’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고 이 마을에서 고달사터 까지는 약 5리정도 된다.
 


둔촌은 강가에 봉서정(鳳棲亭)을 짓고서 직접 농사를 짓고, 독서와 산수를 즐겼다. 포은이 한번은 편지를 부쳐 왔는데, "여강(驪江)은 제가 좋아하는 곳인데 선생께서 저보다 먼저 가 계시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벼슬살이는 제가 좋아하는 바가 아닙니다. 매번 가을이 올 때마다 산수의 흥취가 더욱 제 마음속에 감응하는데, 선생께서는 어떤 사람이기에 유독 이를 누리신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