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곡 김육 선생(1580년~1658년)은 조선 최고의 경세개혁가, 대동법의 명재상, 실학의 태두 등으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고 도탄에 빠진 조선을 다시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런 잠곡 김육 선생과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적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
첫째, 이른 나이에 부친이 사망했다. 잠곡 김육 선생은 14세에, 김 지사는 11세에 부친이 돌아가셨다. 유년기 시절 부친의 사망은 정서적, 경제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둘째, 두 사람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민초의 삶을 직접 체험했다. 잠곡 김육 선생은 부친 사망 후 이곳저곳 거처를 옮기며 성장을 해야 했고, 청년기 때는 잠곡(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4리 지역)에서 직접 움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10년을 살았다. 김동연 도지사는 서울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과 성남시의 천막촌에 가족 부양을 하며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고시에 합격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두 사람은 똑같이 25세에 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됐다는 점이다. 1580년생 잠곡 선생은 1605년 사마시에, 1957년생 김동연 도지사는 1982년 행정고시와 입법고시에 동시 합격을 했다. 두 사람 모두 부친을 잃고 어려운 가정의 형편을 각고의 노력으로 극복한 공통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네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 다 청렴한 공무원의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공무원의 삶을 살았다는 점도 따로 공통점이 될 수 있겠으나 ‘청렴’하기까지 했다는 점은 더더욱 큰 공통점이다. 잠곡 선생은 1624년 잠곡을 떠나 음성현감으로 관직에 나선 뒤 1658년 78세에 사망할 때까지 34년간 관인 생활을 하고 두 차례 영의정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의 재산이라고는 초가집 한 채뿐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집 한 채 없는 당시 우의정이었던 아버지를 보다 못한 그 아들이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김동연 도지사는 고위공직자이었으면서도 2015년 공개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성완종 선물리스트 -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16년간 보낸 선물 품목과 액수가 적힌 리스트 -’에 이름이 빠져있어 주목을 받았고, 지난 제8회 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후보 공보물에 공개한 재산이 본인과 직계존비속 합쳐 4억 원에 불과하니, 우리나라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지냈던 고위공직자치곤 청렴하게 살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잠곡 김육의 대동법과 김동연 도지사의 토지공개념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잠곡 김육 선생의 졸기(卒記)에는 ‘평생 경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잠곡 선생은 조선이 인정한 경제관료였다. 김동연 도지사가 정통 경제관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두 토지 정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참 큰 공통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다섯째 공통점이다. 잠곡 선생은 토지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게 하는 조세제도인 대동법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공직생활을 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동법 시행은 잠곡 선생 평생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김동연 도지사는 자신의 저서 <대한민국 금기깨기>에서 "토지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시장 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 필요하다" 고 밝혔다. 잠곡 선생의 조선 시대 때도 그리고 지금도 부동산 불로소득은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켜 국가공동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암적인 존재였다. 토지를 통한 불로소득을 없애 공정과세와 경제정의를 실천하겠다는 점에서 4백 년을 넘어 두 경제관료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민생 위주의 정치
잠곡 김육 선생은 당파를 떠나 부국안민(富國安民)의 정책을 추진하는 일에 몰두한 분으로도 칭송을 받는다. ‘당론을 배척하고 공정한 도리를 넓혔다’, ‘사리사욕을 행하고 당파를 비호하면 비록 평소 친분이 있더라도 사정없이 배척했다’ 라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평했다. 이런 잠곡 선생의 처신은 그 가문의 전통이 되었던지 정파적으로 한쪽에 치우쳤으면 되기 어려웠을 왕비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잠곡 선생의 친손녀이고,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는 잠곡 김육의 7대손이다. 김동연 도지사는 어떤가? 그는 과거 대선후보 였을 때도 그리고 경기도지사인 지금도 ‘정치개혁과 정치교체’를 꾸준히 주장하며 지난 연말 여·야·정협의체를 출범시켰다. 도의회의 원구성이 78대78 여야 동수라는 점에서 극한대립으로 치달을 수 있는 정치를 협치로 만들어보겠다는 노력의 결과로 보인다. 이 또한 잠곡 김육 선생처럼 부국안민에 더 집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바로 여섯 째 공통점이다.
이런 적지 않은 아니 숫자가 아닌 질로 봐서는 그 공통점의 깊이가 남다른 김동연 도지사가 잠곡 김육 선생을 선양해 그 정책적 롤모델로 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을까? 마침 김동연 도지사는 도지사 선거 시절 가평군의 민주당 군수후보와 정책협약을 통해서 ‘잠곡 김육 선생 기념관 건립’을 공약한 바가 있다. 비록 가평군의 군수는 민주당 후보가 아닌 국민의 힘 서태원 후보가 당선됐지만, 서태원 후보도 ‘잠곡 김육 선생 기념관 건립’ 공약을 했다. 그리고 올해 ‘잠곡 기념관 건립 타당성 용역’ 예산을 수립했다. 여야 협치의 좋은 사례를 만들 수 있다.
대동세상의 꿈, 일곱 번째 공통점
그러나 필자는 학술적인 기념관으로 잠곡 선생을 가둬두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다. 김동연 도지사는 가평군이 포함된 경기 동부권을 ‘레저·생태·문화 육성 중심’의 지역으로 만들겠다고 하며 특히 가평군에는 ‘국제한류문화센터 설립 지원’을 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잠곡 김육 선생은 대동법 외에도 서양 역법을 받아들인 시헌력을 시행해 농사일에 도움을 주었고, 동전의 유통, 점포 설치 등을 주장해 조선 후기 상업 발전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전염병과 기근에 대처하는 방법을 한글 책자로 만들어 보급하는 등 다양한 출판을 통해 민중들의 안녕과 계몽에도 앞장서고, 수레와 수차 개발에도 힘을 기울이셨다. 이런 이유로 선생은 실학의 태두로 모셔지고 있다. 또한, 주목할 점은 잠곡 선생이 이 모든 일을 공무원으로서 추진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선생은 혁신행정가의 사표로서도 전할 이야기가 많다. 대동법과 토지공개념, 공정과세, 실학, 경제민주주의, 행정혁신 등 선생의 철학과 삶과 연결한 다양한 주제와 스토리텔링 자원 그리고 가평군이 갖고있는 풍부한 레저, 생태 자원을 엮어 국제적인 M.I.C.E 관광의 센터로 만든다면 어떨까? 스위스의 산골 마을 다보스에서 세계적인 ‘다보스 포럼’이 탄생한 것처럼 경기도의 산촌 지역 가평군을 국제적인 포럼의 명소로 만든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고품격 ‘국제한류문화센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백년 덧 시름 없을 일을 의논’하며 대동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잠곡 선생의 꿈을 김동연 도지사가 ‘국제한류문화센터’로 만들어 간다면 이제 두 사람은 시공간을 넘어 일곱 번째 공통점을 갖게 될 것이다.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나를 부르시게
우리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옴세
백년덧 시름없을 일을 의논코자 한다네 - 잠곡 김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