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 눈을 반짝이며 나른한 몸짓으로 털을 고르고 세수를 하고 부비적거리는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이 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 다시 태어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기회를 얻기 위함이다.
스스로를 ‘젤리클 고양이’라 명명하는 이 고양이 무리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모여 자신들이 젤리클 고양이임을 축하하며 고양이들의 축제 ‘젤리클 볼’을 개최한다.
이 축제에서 현명한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러노미’가 천국으로 보낼 한 고양이를 선택해 새 생명을 얻게 한다.
1981년 영국에서 초연된 후 전 세계 15개 언어, 30개국에서 7550만 명이 관람한 스테디셀러 뮤지컬 ‘캣츠’가 5년 만에 오리지널 연출로 내한했다.
2018년 공연 이후 만날 수 없었던 젤리클 석(1층 통로 좌석)이 부활했다. 공연 시작과 동시에 젤리클 고양이로 분한 배우들이 객석 곳곳에서 관객들과 마주한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 배우들은 관객들 앞에서 침으로 몸을 닦는 ‘그루밍’을 하고, 고양이가 공격태세를 취하는 소리인 ‘하악질’을 하기도 한다. 고양이들을 놀아주는 낚시대 장난감을 가져와 흔드는 관객도 있었다. 배우들은 작은 앞발로 ‘냥냥펀치’를 날리는 고양이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해 웃음을 안겼다.
단순한 분장이 아닌 눈빛 하나, 표정 하나까지도 고양이로 완벽 빙의한 배우들은 올드 듀터러노미에게 저마다의 사연을 들려주고, 장기를 뽐내며 선택받기를 기대한다.
◇ 인간의 삶과 닮아있는 고양이들의 이야기
바퀴 벌레와 쥐들을 교육시키느라 바쁜 검비 고양이 ‘제니애니닷’, 인기많은 바람둥이 고양이 ‘럼 텀 터거’, 뚱뚱한 부자 고양이로 다른 고양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버스토퍼 존스’, 나쁜 짓을 일삼으며 고양이들을 위협하는 악당 고양이 ‘맥캐버티’, 도둑 고양이 커플 ‘몽고제리’와 ‘럼플티저’ 등 무대 위 다양한 고양이들의 사연이 줄을 잇는다.
오랜 세월 젤리클 고양이로 지낸, 나이가 가장 많은 극장 고양이 ‘거스’는 젊은 시절 유명한 배우였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연기를 잘 할 수 있다며 젊은 시절 찍었던 ‘그로울타이거의 마지막 접전’이란 연극을 펼쳐보인다.
모두가 즐거운 한 때 한 발짝 떨어져 이들을 바라보는 고양이가 있다. ‘그리자벨라’ 역시 젤리클 고양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수년 전에 바깥 세상으로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그리자벨라도 세상 풍파를 겪으며 이제는 누추하고 낡은 모습에, 다른 고양이들이 멀리하는 처지가 됐다.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며 ‘캣츠’의 대표 넘버 ‘메모리’를 부른다.
여러 고양이들의 사연으로 꾸며지는 무대는 하나의 주인공이 갈등을 겪고 이를 헤쳐나가는 일반적인 작품과는 다르다. 비교적 단순한 서사일 수 있지만, 고양이들 각자가 처한 상황과 이야기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품은 노벨상을 수상한 T.S. 엘리엇의 시집 ‘지혜로운 고양이들의 지침서’를 무대로 옮겼다. 1년에 한 번 있는 ‘젤리클 볼’에 모인 고양이들의 각기 다른 인생 경험을 보여준다. 새로 태어날 고양이로 선택받기 위해 풀어놓는 그들의 삶에는 새로운 세계와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타자에 대한 예의, 희망과 좌절, 지나간 날에 대한 회한, 행복의 의미 등 인간사의 희로애락부터 사회 부조리를 꼬집는 풍자까지 인생의 단면이 담겨 있다.
◇ 전 세계 프로덕션에서 활약한 배우들 총 출동…큰 절 팬서비스까지
이번 내한 공연에는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투어 등 전 세계 프로덕션과 오리지널 안무가 질리언 린의 추모 특별 공연에 출연했던 ‘캣츠’의 베테랑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리자벨라 역에는 조아나 암필이 지난 40주년 투어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관객들과 만난다. 조아나는 미스 사이공, 레 미제라블, 지저스 크라이스트 등에 출연하며 거장들의 사랑을 받는 슈퍼 디바다. 웨스트 엔드를 중심으로 유럽, 아시아, 호주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젤리클 고양이의 아이돌인 럼 텀 터거 역에는 웨스트 엔드의 떠오르는 루키 잭 댄슨이 출연한다. 발레, 현대무용, 재즈 댄스 등 뛰어난 안무 실력과 끼로 장난기 넘치는 럼 텀 터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 준다.
지혜로운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러노미 역은 한국이 사랑하는 뮤지컬 스타 브래드 리틀이 연기한다. 2017년 이후 3시즌 연속으로 이끌어 온 브래드 리틀은 오페라의 유령에서 2700여 회 이상 오페라의 유령을 맡아 전 세계 최다 출연한 4인 중 한 명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브래드 리틀은 1막이 끝난 인터미션 시간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고 관객들과 함께한다. 무대 한 켠에 앉아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2막 시작에 앞서서는 무대에 가장 먼저 나와 관객들에게 큰절을 올리기도 한다.
또한 ‘제마이마’ 역의 가브리엘 파커는 2막에서 한국 관객들을 위해 ‘메모리’ 중 일부 소절을 한국어로 준비해 선보인다.
공연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3월 12일까지.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