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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85. 남한산성 관어정과 지수당 이름의 깊은 뜻


남한산성 안에 있었던 여러 누정(樓亭)들이 모두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 지수당(地水堂)과 관어정(觀魚亭)은 연못과 함께 있어서 다른 정자들과는 다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사시에 성을 지키려면 무엇보다도 물이 매우 중요한 것인데 남한산성에는 여러 곳에 샘이 나오고 연못은 행궁 안에 한 곳, 지수당 옆으로 3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지금은 행궁 안과 지수당 옆의 2개만 남아 있다.

 

 
정조 3년에 효종 임금 승하 120주년을 맞아 여주에 있는 영릉(寧陵)을 참배하러 오가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렀는데, 이 해가 기해년(1779)이라 기해주필(己亥駐蹕)이라 부른다. 동문 밖 계곡에 좌의정 김종수의 글씨로 己亥駐蹕이라 새긴 바위가 있는데,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임금이 8월 7일 지수당에 행차해서 백성들이 고생스러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청취하였다. 임금이 이천에서부터 가마를 타고 경안역에 도착하여 쉬고, 남한산성의 좌익문(左翼門, 동문)에 이르러 갑옷으로 갈아 입었다. 임금이 행차하는 길가에는 사람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모여들어 길에 가득 찼는데, 심지어는 멀리 강원도에서 행차 구경을 온 사람도 있었다.
 


이어서 지수당에 나아가 말에서 내려 당(堂)에 올랐다. 임금이 "승지, 사관, 대신, 수어사만 입시하라."고 명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서명선(徐命善), 수어사 서명응(徐命膺)이 나와서 엎드렸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은 말을 타고 달린 뒤끝에 연이어 탈이 없는가? 영상은 연세가 높으나 근력의 굳세고 튼튼함이 오히려 좌상보다 낫다." 하니, 김상철이 아뢰기를, "신들이 다행히 넘어짐을 면한 것은 모두 전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하고 임금의 컨디션은 어떠냐고 하니, 정조 임금이 "피곤한 줄 모르겠다."하였다. 이 때 김상철의 나이가 68세였고, 서명선은 51세였다. 기해주필이 끝나고 다음 달에 천둥이 치는 기상이변이 있어 둘 다 사임하게 되지만 서명선이 김상철의 후임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정조 임금이 지수당에 들른 것은 군사들이 잠시 휴식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곳에 들른 것은 군병으로 하여금 잠시 휴식하게 하고자 한 것인데, 이 당(堂)은 사면이 지수(池水)로 둘러져 있어 군병들도 갈증을 풀기에 충분할 것이니 매우 다행이다." 하고 어느 해에 세운 것인지 물으니 수어사 서명응이 대답하기를 현종(顯宗)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李世華)가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또 임금이 말하기를, "지수라는 이름은 ‘땅속의 물은 병중(兵衆)이다. 노성(老成)한 사람이라야 길하다.’라는 뜻에서 딴 것인가?"하매, 서명응이 "그렇습니다."하였다. 즉, 백성을 용납하고 무리를 기른다는 뜻이 담겼다. 지수당의 건축에 사용한 목재는 동문 밖 엄고개에 주정소(晝停所)를 새로 지으면서 나온 폐목재를 재활용한 것이다. 지수당 앞에 이세화 선정비가 있다.
 
정조 임금은 백성들이 늘 굶주림과 추위에 괴로운 걱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구중궁궐이 비록 깊숙하다고는 하나 백성들이 유랑하며 몹시 괴로운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어떻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편안하겠냐고 말하고, 산성 주민들의 부채탕감과 특별 과거시험 등을 치르는 일을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행행(行幸)’이라고 하는 것은 백성이 임금의 행차를 다행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임금이 이르는 곳은 반드시 백성에게 은택이 미치므로 백성들이 모두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서 그런 것이다. 이제 나의 가마가 이곳에 이르렀으니, 저 백성들이 어찌 바라는 마음이 없겠는가? 행행의 의미를 내가 실천한 뒤에야 스스로 마음에 부끄러움을 면하게 될 것이다."하고 백성들의 부채를 탕감해 준 것이다.

 

 
한편 지수당에 인접하여 관어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았다. 1804년(순조4)에 광주유수 김재찬(金載瓚)이 지었다. 흔히들 물고기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제갈공명이 위나라 군사 10만 대군과 대치하였던 옛일과 관련이 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제갈량은 정자에 앉아서 물고기 떼의 이동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비가 힐책하였더니 물고기들의 이동을 보며 적군의 이동을 생각하고 이길 수 있는 전략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김재찬의 ‘관어정소지(觀魚亭小識)’에 언급돼 있다. 이 정자에 올라 ‘관어정’ 이름을 따라서 경계할 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관어정을 건축한 김재찬이 남긴 글을 통해서 연못은 기존에 3개로 알려진 것과 달리 4개인 것으로 기록돼있다. 네 연못 가운데에 지수당이 있고 곧바로 당의 서쪽 첫 번째 연못에 작은 섬이 있는데, 그 위에 한 정자를 세웠고, 단풍과 버들이 둘러 있었다. 위는 띠풀 지붕이고 아래에는 난간이 있으며, 지수당과 서로 마주하였다. 기둥이 6개라고 했으니 6각정이었다. 작은 거룻배를 두고 왕래하였다.
 


선선한 바람에 구름은 연못 속에서 흐르고, 잔잔한 물결 속에 물고기 떼 노닌다.  바람과 구름의 만남(風雲之會), 물과 물고기의 어울림(水魚之交), 모든 것이 제자리가  있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 평안한 세상이 될 것이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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