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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의 광고로 세상 읽기] ⑪ 광고와 예술, 그 오묘한 관계의 역사

 

 

1.

광고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티브이와 잡지와 온라인에서 네온사인처럼 번쩍이는 메시지들. 그 현란한 세 치 혀에 설득되어 필요도 없는 물건에 돈을 쓸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싸기는 하다. 멀쩡히 잘 사용하던 기존제품에 싫증을 느끼게 만들고 새 물건을 구입하도록 부추기는 일종의 요물이니까.

 

밤을 낮 삼아 아이디어 짜내는 광고인들이 이런 평가를 들으면 억울할지 모른다. 하지만 광고사에 아로새겨진 업보가 분명하다. 특히 2차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차처럼 질주하던 19세기 중엽 이후가 그랬다. 미국과 유럽의 광고산업 규모가 커지고 광고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부작용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허위와 과장을 써서라도 물건만 팔고 보자는 판매지상주의가 도를 넘은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이 광고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1850년대 미국 대중신문은 수익의 3분의 1 이상을 광고수익으로 벌어들였다. 이런 재정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광고는 신문발행인들에게조차 일종의 ‘필요악(必要惡)’ 취급을 받았다.

 

광고의 이러한 처지는 순수 예술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음악, 미술, 문학 등은 오랫동안 문화적 귀족의 반열에 오른 존재였다. 반면에 광고는 저 높은 무대를 향해 경배를 드리는 하층민에 불과했다. 그만큼 광고와 예술의 간격은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2.

19세기 말이 되자 사건 하나가 벌어진다. 광고가 순수 예술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것이다. 빅토리아조(朝) 라파엘 전파(前派)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 경. 당시 영국 최대의 광고주 피어스 비누가 그의 회화작품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그림 1>이 밀레가 그린 원본이다. 나무 둥치에 앉은 금발의 미소년이 눈을 들어 비누거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은 1886년 ‘아이의 세계(A Child 's World)’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밀레는 (훗날 해군제독이 되는) 자기 손자를 모델로 한 그림을 윌리엄 잉그램에게 팔았다. 신문사 경영주였던 잉그램은 이듬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밀레의 작품을 자기 신문에 전면화보로 실었다. 이 시기 영국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 신문에 실린 멋진 그림을 오려내어 액자 형태로 벽에 거는 걸 좋아했다. 거품(Bubble)이라 이름을 바꾼 밀레의 그림을 게재한 신문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충분한 효과를 본 잉그램은 2,200파운드를 받고 작품을 다시 피어스 비누회사 소유주 토마스 배럿에게 판매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장사의 귀재로 불리던 배럿이 이 그림을 광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그림 2).

 

 

 

순수 회화를 천박하기 짝이 없는 광고에 사용한 이 행위는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당시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금기를 깨트렸기 때문이다.

 

두 그림을 한번 찬찬히 비교해 보시라. 별달리 고친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원본의 위쪽, 비누거품 좌우로 ‘피어스 비누(Pear’s soap)’라는 상표명을 추가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의 왼쪽 신발 아래 (거무스레한 색깔의) 비누를 살짝 배치했다. 토마스 배럿은 막대한 광고비를 투자하여 영국의 모든 일간지에 전면 광고를 노출시킨다. 순수 예술과 상업 광고를 결합시킨 이 최초의 사건은 대중들의 폭발적 주목을 끌었다. 피어스 비누가 경이적 판매고를 달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곤경에 빠진 것은 원작자 밀레였다. 왕립학술원 회장까지 지낸 이 초일류 화가는 고귀한 예술혼을 돈 몇 푼에 팔아먹었다는 조소와 비난을 뒤집어쓴다. 자기 그림을 광고에 쓰겠다는 말을 전해들은 들은 밀레는 (물론)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소유권을 사들인 바렛의 시도를 막지 못했다. 에버렛 밀레는 1896년에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영국의 유명 신문들에는 밀레의 ‘부도덕한’ 행위에 분노하는 독자 투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3.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배리 호프먼은 예술과 광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근대 광고의 탄생 이래 둘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는 거다. 예술은 삶의 진실을 관통하는 최고급 창조의 소산이었다. 그에 반해 광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건만 팔아치우면 된다는 조잡하고 부정직한 행위였다.

 

하지만 광고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산업 자본주의 난숙(爛熟)에 따라 광고와 순수 예술의 엄격한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미학자 볼프강 하우크는 자신의 책 ‘상품미학비판’에서 그 이유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무제한적 식욕이 상업적 파괴력을 얻기 위해 순수 예술의 대중적 공감능력을 무서운 속도로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대중 사회에서 차지하는 광고의 위상이 자연스레 높아진 것이다.

 

수준급의 회화 작품이 광고에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 흐름을 선도한 것은 프랑스와 스위스 등의 유럽이었다. 스위스의 고기통조림 회사 '율리우스 매기 앤 시에(Julius Maggi & Cie)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911년 이 회사는 이탈리아의 석판화 대가 레오네또 까삐엘로를 초빙해서 광고포스터를 만든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빨간색 정육각형 패키지의) 통조림 '쿠브(Kub)' 포스터는 유럽 예술계에 일대 충격파를 던진다. 아래에 “K에게 물어보세요(Exiger le K : Ask the K)"라는 독일어 슬로건이 쓰인 까삐엘로의 작품이 있다.

 

 

 

이 포스터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는 파블로 피카소다. 그가 대상물을 기본적 입체 형태를 전환시켜 재창조하는 입체파의 대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12년에 그린 ‘바이올린과 포도(violon et raisins)’가 유명하다. 같은 해 화가는 입체파 작품을 하나 더 그린다. ‘포스터가 있는 풍경(Paysage aux affiches)’이다. (그림 4). 그런데 이 작품에는 매우 희귀한 형상이 포착되어 있다. 광고를 자세히 살펴보시라. 화면 왼쪽 아래에 정육각형 입체로 묘사된 선화가 하나 보일 거다. 그 안에 무슨 글씨가 적혀있는가?

 

 

 

‘Kub’다. 즉 당시 판매되던 ’쿠브' 통조림의 패키지를 그려 넣은 게다. 천하의 피카소까지도 자기 작품에서 특정 제품 브랜드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조금 믿기는 어렵지만, 광고역사가 핀카스는, 심지어 피카소가 참여한 큐비즘(Cubism)이란 명칭이 통조림 쿠브(Kub)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4.

광고와 순수 예술이 경계선을 허물고 본격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싹을 틔운 팝아트(pop art)가 일등 중매쟁이 역할을 한다. 이 새로운 대중예술(popular art)은 하위문화인 만화, TV콘텐츠, 영화포스터 그리고 광고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변형시켰다. ‘작은 금발 폭탄(That little blonde bomber)’이라 불린 메리 웰스 로렌스가 광고에 음악, 패션, 팝아트를 접목시킨 대표적 크리에이터였다.

 

광고와 예술의 밀월은, 오일쇼크가 세계를 지배한 1970년대에는 조금 잠잠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예술계를 선도하던 유명 팝아티스트들이 대거 광고와 관계를 맺는다. 이들이 광고에서 예술적 이미지를 빈번히 차용한 것은, 광고야말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이상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고를 작품 속에 도입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광고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작업을 통해 예술이란 존재가 일상적 삶과 동떨어진 곳에 고고하게 존재하는 범접불가 영역이 아님을 폭로하려 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의 압솔루트(Absolut) 캠페인이다. 투명한 유리병의 이 스웨덴 산 보드카가 미국에 첫 수출된 것은 1981년이었다. 4년이 흐른 후 보드카 수입회사 CEO 미셀 루가 자기 친구이자 초절정의 인기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부른다. 광고에 사용할 압솔루트 병을 좀 그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워홀은 6만 5천 달러를 받고 광고 그림을 만든다. 그리고 이 작품이 세상을 뒤흔들게 된다.

 

 

워홀로부터 시작된 예술가들과의 공동작업은 갈수록 범위를 넓혀갔다. 전설적 그래피티(Graffiti) 미술가 키스 해링이 만든 압솔루트 캠페인(그림 6)은 광고의 예술적 성취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90년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요절한 그는 일생동안 인종차별과 동성애 박해에 대하여 저항한 사회 운동가였다. 전통 예술의 귀족주의를 무너뜨리고 일반인들도 예술을 즐기고 누려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한 귀결이 광고제작 직접 참여였다.

 

흥미로운 것은 해링이 만든 압솔루트 광고 시리즈가 대중에 공개된 것은 그가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숨은 스토리가 더욱 화제를 끌고 압솔루트의 인기를 상승시켰다.

 

 

5.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광고와 예술의 관계는 최고 수준으로 격상된다. 광고가 오히려 예술을 도구화시키면서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위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대중의 천시를 받던 광고가 거꾸로 대중문화에 영감을 부여하면서 유행과 패러디를 이끄는 진원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92년 발표된 화가 조지 로드리그(George Rodrigue)의 ‘푸른 개(blue dog)’ 시리즈가 상징적이다. 광고주는 역시 압솔루트 보드카. 로드리그는 자신의 광고 일러스트레이션에 늘 ‘푸른색 개’를 등장시켰다. 이 작업을 통해 광고와 예술의 독특한 혼종(hybrid)을 탄생시킨다. 그는 자기가 만든 광고를 회화의 자격으로 갤러리에 전시했다. 이 전시 이벤트는 광고와 예술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며 당대 미술계의 화제를 집중시켰다.

 

 

글을 마치려 하니, 문득 다시 19세기가 떠오른다. 온갖 수모 끝에 세상을 떠난 존 에버렛 밀레 말이다. 그의 사후 소설가 메리 코렐리는 자기 작품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화가를 비난했다.

 

“나는 밀레가 피어스 비누의 거품을 부는 작은 녹색 소년을 그릴 정도로 스스로를 타락시킨 순간, 예술가로서 명성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확신해. 어떻게 광고에 예술을 팔아먹을 수 있어?”

 

상상을 해본다. 광고에 대한 멸시와 폄하가 일상적이던 그 시절 사람들이 오늘날 광고가 예술과 맺은 관계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기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릴 게다. 두 장르가 유전자 결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유로이 쌍방을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와 예술이 펼치는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이 일 년 내내, 사시사철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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