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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 칼럼] 가스라이팅 시대

 

넷플릭스의 다큐 시리즈 파급력이 만만치 않다. 『나는 신이다』를 보며 한숨 내쉰 사람이 한두 명 아닐 것이다. 보편과 상식의 세계에서 상상조차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검찰총장이 입장을 표명하는 등 여론이 들끓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의문을 하나로 축약하면 '어떻게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에 그리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을까?'가 아닐까 한다.

 

실제 다큐에서 다룬 사이비 교주들은 누가 보더라도 특별난 게 없는 사람들이다. 학력이나 지나온 삶을 보면 보통 사람들보다 현저하게 뒤처진다. JMS 정명석의 경우 학력이 초졸인데 소개된 사이비 교주 대부분이 저학력자들이다. 기독교 교단에서 엘리트 코스는커녕 평범한 과정도 제대로 밟지 않았다.

 

반면에 그들을 떠받든 신자들은 대졸 학력이거나 중산층 이상이다. 성폭력 혐의로 수감 중인 이재록이 세운 교회에는 회계사 등 사회의 엘리트들이 적잖이 포진돼 있다. 이들이 성금 등으로 한 번에 건네는 봉투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른다. 경제적 능력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준다. 정명석이 수배 중이었을 때 법률 팀을 이끈 신도는 검사와 국정원 직원, 육사 출신 군 간부, 대학교수 등 사회 엘리트층이었다. JMS 교회 중 신도수가 가장 많은 곳이 분당 백현동의 모 교회라는 건 상징적이다. 사이비 교주를 떠받드는 층이 고학력자에 중산층 이상인 것이다.

 

고학력자·중산층이 저학력자·가난한 집안 출신 사이비 교주에게 가스라이팅 당한다는 건 너무 비대칭적이지 않는가?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가스라이팅이 가능하려면 그 반대여야 할 것이다. 학력이나 경제적 능력 등이 우위에 있는 쪽이 모든 면에서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상을 일거에 깼기에 『나는 신이다』가 준 충격이 컸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은해 씨의 용소계곡 살인 사건도 비대칭적이다. 수사 전문가들이 가스라이팅 사건으로 이름 붙인 이 사건의 살인 용의자 이 씨는 중졸인데 반해 숨진 남편은 명문대 출신인데다 대기업 연구소 직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여성을 가스라이팅해 무려 2500번이나 성매매 시킨 혐의로 지난 달 붙잡힌 여성도 피해자와 가깝게 지낸 회사 동료였다.

 

이같은 비대칭적 가스라이팅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의 상식인 수직적 신분 관계가 가스라이팅의 상수가 아니라는 강력한 반증이다. 가스라이팅은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연인이나 부부, 친구, 직장 선후배 등 가까운 사이에서 가스라이팅이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고 본다. 널리 알고 있다시피 가스라이팅은 1938년 패트릭 해밀턴의 ‘가스등(Gas Light)’이라는 연극에서 유래한 이래 1946년 조지 쿠거 감독의 동명 영화를 통해 일반화되었다. 이 용어 하나로 인간과 인간의 잘못된 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아무튼 사례를 살펴보면 가스라이팅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동정심, 연민을 파고든다. 한 번 걸려들면 자신이 심리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돈도 학력도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철학의 주제 중 하나인 주인의식은 그래서 영원하다는 걸 확인하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인간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는 가스라이팅의 폐해가 그만큼 넓고 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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