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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살아남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사치일 뿐인 이 세상에서

148. 로기완-김희진

 

넷플릭스가 3월 초 공개했던 송중기 주연의 영화 ‘로기완’은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잘못 만든 작품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이한 소재의 영화였고 북한, 탈북, 난민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새로웠다. 배우들도 안정적이다. 특히 조연들, 서브 텍스트 인물들이 흔들리는 드라마 전체를 탄탄하게 받쳐 낸다. 로기완 삼촌 역의 서현우와 엄마 역의 김성령은 일단 이 영화의 시작을 좋게 만든다.

 

연변 여자로 로기완의 고기 공장 선배 격인 선주 역의 이상희는 늘 그렇지만 연기가 최고 급이다. 변호사 역으로 나온 강길우, 여자 주인공 마리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조한철도 영화 전체를 안정적으로 받쳐 준다. 심지어 마리의 죽은 엄마 역의 이일화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는 어쩌면 캐스팅이 살린 작품이다.

 

 

여주인공 마리 역을 맡은 최성은은 잘 하지도 못하지도 못했다. 그건 순전히 이 마리라는 캐릭터가, 당초 영화가 추구했던 작품의 방향(그런 게 만약 있었다면)에 비해 지나치게 과장되게 ‘운행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갱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격 도박판의 선수이다. 마리는 술과 약물, 무엇보다 폭력에 휩싸여 살아가는 위험한 상태의 여자이다. 그럼에도 배역을 맡은 최성은(‘시동’ ‘젠틀맨’)은 최선을 다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로기완 역의 송중기는 오랜 경력의 배우답게 부드럽고 순조롭게 연기를 이어 간다. 다소 ‘쉽게 간다’는 느낌까지 줄 정도이다.

 

 

이 영화의 최대 실수는 결말이다. 감독 김희진의 선택인지, 제작사 용필름의 임승용 프로듀서의 결정인지, 아니면 넷플릭스의 압력이었는지(넷플릭스는 최소한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모르겠으나 마지막을 꾸려 간 서사의 방식은 전형성의 식상함을 벗어나지 못해 인상을 찌푸리게까지 한다.(풀 샷 화면 양쪽에서 달려오는 두 남녀의 씬이란...70년대 한국 영화 화법이다.)

 

무엇보다 앞의 서사와 역설적으로 충돌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주인공 로기완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모든 게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현재적 삶의 조건이 그런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마지막 결말은 그가 그렇게 얘기했던 사치의 극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많은 관객들, OTT 시청자들이 이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평자의 입장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로기완의 남한식 이름은 노기완이겠다. 1990년 12월 1일 생이고 북한 자강도(과거의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의 일부를 통합한 구역) 우서군 출신이다. 그곳 하상협동농장 관리위원회 제7작업실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슨 일엔가에 연루돼 북한을 탈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로기완은 탈북자 신분으로 벨기에에 왔지만 도통 정치적 난민의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국가가 지원하는 생활비를 얻을 수 있다. 거주민 자격을 얻으면 취직도 가능하고 여러 합법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정치적 망명자들이 난민 자격을 따내려고 애를 쓴다.

 

경쟁이 이만저만 치열한 것이 아니다. 그 자격을 얻기까지 많은 난민들은 불법체류의 노동에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당 국가 내의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해당 국가 공권력의 행사 때문에 빚어지는 일일 수도 있지만 가장 심한 것은 자국 노동자들의 차별 때문이다.

 

자국 노동자들은 난민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그들은 불법 이주자들을 걷어차고 침을 뱉으며 (얼마 되지도 않는) 가진 걸 빼앗아 가려 한다. 그리고 늘 이렇게 얘기한다. “니들 나라로 돌아가!” 난민들이 가는 나라마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이유이다. 로기완도 이런 폭행을 수없이 겪는다.

 

 

영화 ‘로기완’은 유럽의 한 탈북민이 겪는 처참하고 치열한 생존기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탈북자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 역시 꽤나 양가적(兩家的)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탈북자들에 대해 모순과 이중적 감정을 지녀 왔다.

 

하나는 강고하고 지독한 북한식 사회주의 독재(조선왕조 공산주의)에서 탄압받았던 약자의 인물이라 해서 동정하고 지지하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이들이 남한 내에서 극우적 정치인이나 극보수의 기독교도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편승해 우리 사회 내 사회민주화를 방해하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들로 치부하곤 한다.

 

영화 ‘로기완’은 탈북민들에 대한 우리의 위선적이고 중첩된 시각을 비껴가게 한다. 탈북민은 어떤 지옥에서라도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고 세상은 늘 지옥에서 살아 남는 자들이 지옥을 만든 자들을 이기는 법이다.

 

로기완의 엄마는 죽어 가는 와중에 너는 죽지 말고 어떻게든 꼭 살아남으라며, 여기 말고 어디 좋은 데로 가서 인간답게 살다 죽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로기완은 어머니의 시신을 시체 해부용으로 병원에 판 돈으로 지옥의 땅을 벗어 난다.

 

엄마의 몸뚱이를 판 돈으로 그는 자유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건 로기완의 나중에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깨달은 사실과 맥락이 같은 것이다. 자신과 같은 (정치적 난민은) 벨기에(같은 국가의 땅에서) 살 권리도 없지만 떠날 권리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어머니의 돈으로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정치적 자유가 곧 정신적 자유까지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는 오랜 기간, 상처(그의 왼쪽 손목에 나있는 면도날 자국)와 트라우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로기완’은 따라서, 그런 처절하면서도 절절한 비극적 정서에 좀 더 몰입되어야 했던 작품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져가야 했을 주조(主潮)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제 북한이니, 탈북이니 하는 얘기의 영화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 제작사 용 필름(‘뷰티 인사이드’ ‘독전’ 등)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을 것이다. 원작에는 거의 없는 캐릭터 마리가 과도하게 증폭된 이유이다.

 

제작자와 감독은 이 영화를 대중적인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로맨스와 액션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넣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너무 나갔다. 둘의 연애가 너무 달콤하고 순진하며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다소 갑작스럽다. 특히 마리가 아버지에게 엄마의 안락사 과정을 추궁하는 장면은 식상함의 극치이기도 하다. 마리는 오랜 투병 생활을 한 엄마의 죽음을 오직 아빠의 책임으로만 묻는다. 그녀는 엄마의 추도 모임에서까지 약에 취해 난동을 피운다.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는 장면을 더러 넣은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편집에서 과감하게 들어냈어야 옳았다.

 

 

원작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는 탈북자 로기완을 만나기 위해 벨기에에 온 한 르포라이터 작가인 김 작가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그녀, 김 작가는 로기완을 만나지는 못하지만(그는 이미 영국으로 떠났다.) 박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의 일기장을 전해 받는다.

 

원작에서 아내가 안락사로 숨을 거두는 사람은 바로 이 박이라는 한인공동체 봉사 요원이다. 김 작가는 한국 출판사에 자신을 연모하는 사람이 있지만 박을 통해 로기완과 교감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 김 작가가 결국 깨닫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사실은 ‘난민적’ 존재라는 것이며 난민들이 정착을 원하듯 우리 모두도 (정신적) 정착을 원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영화 ‘로기완’은 원작의 모든 캐릭터를 병합하거나 분리하고,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원작과는 다른 선상에 놓일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한다. 결과는 원작과는 달리 다소 상업적이고 대중적이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로기완’이 아까운 것은 그 지점에 놓여 있다. 적절한 작품성과 문학성, 적절한 상업성과 대중성을 혼합해 균형을 맞췄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걸 보여 줄 수 있는 게 바로 엔딩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열린 결말로 가야 했을 것이다. 혹여나 마지막 장면(그게 설마 마다가스카르라고 얘기하지는 말지니)이 로기완의 상상이자 판타지였다고 말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제발 그거였으면 좋겠다. 평론가로서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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