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포르투갈은 혁명 50주년을 맞았다. 결전의 날은 1974년 4월 25일이었다. 젊은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국군운동(MFA)이 혁명을 단행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주의, 자유, 식민지 전쟁의 종료, 그리고 포르투갈의 발전이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혁명의 신호를 알렸고, 장교들의 지휘로 공항, 방송국, 군사기지 등 주요 시설이 점령되었다. 혁명 소식을 들은 리스본 시민들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들의 손엔 카네이션이 들려있었는데, 혁명군을 지지한다는 표시였다. 시민들은 집에서 음식과 커피를 만들어 군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날 정부 측 경찰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네 명 있었을 뿐 혁명군에 의한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 카에타누 총리는 브라질로 망명하였고, 군인들은 시민들이 준 카네이션을 총구에 꽂았다. 무혈로 이룬 ‘카네이션 혁명’은 이렇게 막을 내렸고, 매년 4월에는 ‘자유의 날’을 기리는 카네이션, 사진, 그림들이 즐비하다.
포르투갈은 1933년 개헌과 함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총리의 독재 치하가 되었다. 파시즘 단체 ‘에스타도 노보’의 중심인물이었던 살라자르 총리는 입법권과 행정권은 물론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출판은 검열되었다. 정당 활동이나 노조 활동이 불가능했으며, 악명 높은 비밀경찰이 활동하였다. 살라자르 정부는 국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포르투갈의 근대화를 막았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은 농촌경제가 중심이 되었고,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소득수준이 낮았다. 너무 가난하여 이웃나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포르투갈은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식민지 전쟁을 고집하였고 결국 경제는 피폐했다. 탈영한 징집병들은 이웃 국가로 가 반전의 목소리를 높였고, 독재정권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500여 년간 대항해시대를 이끌며 식민지 제국을 이루었던 포르투갈이 이렇듯 빈곤 때문에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카네이션 혁명은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포르투갈의 경제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체가(Enough)가 18%의 득표율로 48석을 차지하며 제3의 당으로 부상하자, 50년간 양당 체제를 지켜온 사회당(PS)과 사회민주당(PSD)은 혁명 50년 만에 다시 극우세력이 부상하고 있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금융위기, 정부의 긴축정책, 물가 상승 등으로 경제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기존 양당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정치 질서(Political Order)’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치와 사회구조를 분석해 온 역사학자 게리 거스틀(Gary Gerstle)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미국을 지배했던 정치질서는 ‘보수주의’가 아닌 ‘신자유주의 질서’라고 했다. 「뉴딜 질서의 흥망 1930~1980」(1989)에 이어 34년 만에 출간 한 그의 저서 「신자유주의 질서의 흥망」(2022년)에서, 자유주의를 이어받은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사조나 경제정책의 틀에 국한된 말이 아니며,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통틀어 진보와 보수를 모두 아우르는 현실의 질서라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를 구축한 건 1980년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지만, 이를 확실히 받아들인 건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라고 하면서, 거스틀은 야당 정치인들이 여당 혹은 지배적 정당의 노선과 이념을 받아들여 묵종(acquiescence)할 때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한 정치질서가 성립된다고 역설했다.
체가는 부패를 종식시키고 기성정치를 바꾸겠다는 기치로 젊은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들여 제3의 당이 되었다. 체가의 부상은 이념적 승패 그 이상의 의미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반세기 전 젊은 장교들은 포르투갈이 빈곤에서 벗어나고 번영을 이루기를 바라며 혁명을 단행했다. 못 다 핀 혁명의 카네이션을 피우려면 포르투갈 정당들은 어떤 정치를 실현해 가야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