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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말에게 말 걸기] 크라스노존 총장의 세종대왕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 오데사(Odesa)의 우신스키 국립사범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있다. 이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박토냐(Tonya Park/한국명: 박성미)교수가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그녀를 만났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 등 매일 전투가 치열한 곳과는 달리, 러시아와 전쟁 중이지만 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쉼 없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경보가 울리고, 미사일이 떨어지고, 포탄이 날아오는 때는 온라인으로 강의를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학교에서 강의를 계속한다고 한다.

 

박토냐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차세대이다. 고려인 2세대 3세대들이 모국어라 할 수 있는 한국어를 잊어버렸음에도 그녀는 한국어와 한글을 잊지 않고 자랐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서울대학교에 유학을 와서 한국어교육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를 한국어과 교수로 데려간 곳이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a)의 우신스키 국립사범대학이다. 필자가 2018년에 이 대학에서 열린 ‘유라시아 문화 포럼’에 참여하여 만나보았던 박토냐 교수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소명과 신실함으로 가득했다.

 

이번 서울 방문은 우신스키 사범대학과 국내 한국어교육 관련 재단 사이에 상호 협력 증진을 위해서였는데, 우신스키 사범대학에서는 총장인 안드리 크라스노존(Andrew Krasnozhon) 박사가 대학을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박토냐 교수는 자신이 서울에서 며칠간 수행했던 안드리 크라스노존 총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 이야기에서 묘한 감동이 일어났다. 다음은 역사학자인 안드리 크라스노존 총장의 서울 구경 이야기의 내용이다.

 

크라스노존 총장은 그간 세계의 수십 개국을 여행하였는데, 한국은 처음이라고 했다. 각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그 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 나라의 역사적 인물이나 지도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는 세종대왕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찾아가 보았다. 세종대왕 동상을 본 순간, 크라스노 총장은 “아! 이 동상은 무언가 다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른 데서 느끼지 못했던 일종의 경이감(驚異感) 같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시를 찾아가 보았다. 어느 나라나 어느 도시나 그 중앙 광장에 자기들 역사에서 빛나는 인물을 기리고 기념하는 동상을 세워 놓는다. 그런데 한국처럼 그 민족의 역사적 지도자가 책을 펴서 읽고 있는 동상을 본 적이 없다. 대개는 칼을 차고 있거나, 말 위에서 위엄을 자랑하거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거나, 손을 들어 백성을 향한 위엄을 보이거나 하는 동상이다. 세종대왕의 지도자다운 이미지를 ‘책을 펴서 읽는’ 모습에서 찾으려 한 한국인은 참으로 대단하다. 또 그런 모습으로 지도자다운 길을 걸었던 세종은 더욱 대단하다.

 

필자는 이 내용을 듣고, 나 또한 그간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세계의 여러 광장에서 숱한 역사적 인물의 동상을 보면서도 왜 광화문 광장에 있는 우리 세종대왕의 모습을 의미 있게 떠올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친지들에게 크라스노존 총장의 이야기를 해 주면 하나같이 “아! 정말 그러네. 근데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하고 말한다.

 

상투어(常套語, cliché)는 '진부하거나 틀에 박혀있는 생각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상투어가 돠면 처음에는 있었던 참신한 맛이 없어지고, 그 말의 원래의 뜻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세종로를 지나면서 거의 ‘세종대왕’을 떠올리지 않는다. 세종대왕을 마음에 새기자고 만든 길 이름이 ‘세종로’인데도 말이다. ‘세종대왕’도 ‘세종로’도 상투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크라스노존 총장의 세종대왕 동상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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