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넬슨 만델라는 1994년 5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들어가서 1962년 8월 체포되기까지 그는 집권당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쳤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어 있는 동안 남아공 흑인들과 세계 각국 재야인사들은 그의 석방운동을 벌였다. 결국 1990년 2월, 여론의 압박을 못이긴 더클레르크 대통령은 복역한지 27년 만에 그를 석방했고, 아프리카민족회의를 합법화했다.
만델라는 이후 남아공 정부 및 정당들과 협상을 벌여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고, 1993년에는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그해 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흑인이 대다수인 남아공에서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이 주어진 1994년 총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과반이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하여 국민당, 잉카타 자유당과 거국정부를 구성했고, 다수당 대표로서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된 첫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하며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인권침해 범죄 사실들을 낱낱이 밝혔지만 모두 사면했다. “용서는 하되 잊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며, 오히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함께 뭉쳐 위기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만델라의 리더십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오랜 기간 아파르트헤이트로 분열됐던 사회는 새로운 리더십 아래서도 여전히 분열과 불안 속에 있었다. 만델라는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럭비’에 주목했다. 당시 럭비는 백인들의 상징이었고, 흑인 대중에게는 오히려 차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럭비 국가대표팀 ‘스프링복스’가 자국에서 열리는 1995년 월드컵에서 승리한다면 그 기쁨이 인종차별을 넘어선 통합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프링복스의 주장 프랑수아 피나르를 만나 자신의 뜻을 전했다. 대통령의 진정성을 알게 된 프랑수아는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백인인 팀원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경기에 전념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응원을 받게 된다. 드디어 결승전. 남아공은 세계 최강 뉴질랜드를 맞아 고전했지만,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루며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 날의 승리는 단순히 결승전에서의 우승이 아니라 국민 대통합을 이룬 역사적 사건이었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실화를 영화 ‘인빅터스(Invictus, 2009년 개봉)’에 담담히 전개하며,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큰 울림을 남겼다.
만델라 최후의 자서전으로 불리는 「나 자신과의 대화」(2010)는 넬슨만델라재단이 만델라가 남긴 일지, 서신, 일기, 메모 등을 수집하여 그대로 담은 책이다. 그 책 마지막 쳅터에 대통령 임기 막바지인 1998년 10월 16일에 써 둔, 그의 저서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1994) 속편 초고의 다음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역사는 끊임없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노련한 자유의 투사들을 가지고도 농간을 부렸다. 한 때 혁명가였던 사람들이 탐욕에 쉽사리 굴복하는 일이 빈번했고, 개인의 치부를 위해 공공 자원을 전용하는 행태들이 결국 그들을 제압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목표를 거스름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국민 대다수를 저버리고 이전 억압자들의 대열에 합류해,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강탈해 치부를 했다.” 1996년에 대통령 5년 임기를 연임할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되었고, 당시 만델라 지지율이 80%에 달했지만, 재선 출마를 하지 않고 퇴임했던 이유를 그가 남긴 글에서 확인하게 된다. 만델라의 신념과 경계심, 그리고 그의 리더십을 우리나라 6·3 조기대선에 출마한 후보자들도 가슴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