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해군 사관후보생 임관식 전광판에 비친 청년의 좌우명이 화제가 되었다. 재벌가 4세로 알려진 이지호 씨의 문장은 이랬다. “고통 없이 인간은 진화하지 못한다, 그러니 즐겨라.” 가득한 풍요를 손에 쥔 이가 하필 ‘고통’과 ‘진화’를 삶의 지표로 삼았다는 사실이 신선하다. 그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통을 회피하는 안락함은 결국 성장을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는 고통 없는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시민들은 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소마(Soma)’라는 약을 먹는다. 소마는 즉각적인 행복을 주지만, 동시에 인간이 고통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진화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한다. 분노하지 않으니 저항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니 깊이 사랑할 수 없다. 모든 감정은 연결되어 있어,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마비시키면 사랑과 환희를 느끼는 감각마저 함께 무뎌지기 때문이다. 소마의 진짜 부작용은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고통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앗아가는 ‘영혼의 마비’였다.
현실의 우리는 기쁘고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자주 아프고 쓰라리다. 좌절의 순간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필수 코스다. 그렇기에 우리도 고통을 잊게 해줄 안식처를 찾는다. 운동이나 독서, 관계, 술 혹은 몰입할 수 있는 취미가 삶을 지탱하는 ‘건강한 쉼표’가 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진짜 문제는 안식을 넘어선 ‘차단’을 선택할 때 발생한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스스로 진화할 기회 자체를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휴식이 아니라 회피가 아닐까.
한의원에서 항불안제를 장기 복용하는 분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항불안제는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불안을 낮춰주는 조력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불안 조절을 온통 약물에만 의존한다면, 약은 조력자가 아닌 우리 삶의 주권을 앗아가는 현실판 ‘소마’가 된다.
특히 벤조디아제핀은 주의가 필요하다. 뇌의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GABA 수용체에 결합해 신경세포의 흥분을 강제로 가라앉히는 이 약물은 급성 불안에 즉각적인 안도를 준다. 시작은 쉽지만, 소마가 된 벤조디아제핀은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장기 복용 시 뇌는 인위적인 평화에 적응해 내성을 형성하고, 약 없이는 단 한 시간도 버틸 수 없는 의존의 늪에 빠뜨린다. 특히 3개월 이상의 장기 복용이 알츠하이머 치매 위험을 50%까지 높일 수 있다는 임상 연구들은 섬뜩한 경고를 보낸다. 불안을 지우려다 나를 기억하고 진화시킬 능력까지 지워버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핵심은 불안을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불안은 삶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그 신호를 완전히 꺼버리는 대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낮추는 지혜가 필요하다. 약물을 줄일 때는 ‘애슈턴 매뉴얼’과 같은 점진적 감축 원칙을 통해 뇌가 스스로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한의학적 접근으로 자율신경계의 복원력을 높이고, 신체 기반의 치료를 병행하며 ‘불안과 함께 살아가며 진화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불안은 적이 아니다. 불안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변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술이나 소마, 항불안제는 순간적으로 삶에서 오는 고통을 가릴 뿐 우리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불안을 잠재우는 대신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으며 진화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