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5월이면 이 땅 곳곳에 울려 퍼질 ‘5월의 노래’를 애국가로 부르면 어떨까. 이 땅 곳곳에서 들고일어날 이들과 퍼부어질 독설이 예상된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 노래는 극우 쪽에서 ‘운동권, 종북좌파 선동가’라고 오랫동안 매도했다. 1997년, 김영삼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5.18 기념식에서 불리기 시작했으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다시 하대 당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입지를 세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극우 쪽에서 이 노래를 싫어하는데는 ‘국가전복세력인 빨갱이 노래’라서 말고도 적나라한 가사에도 이유가 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흩어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어쁜 너의 젖가슴/ 왜 쏘았지왜 찔렀지 트럭에 실려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 개 핏발 서려 있네/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진보 쪽에서도 이 노랫말이 미래의 희망과 국민화합을 담아야할 애국가에는 맞지 않는다 할 듯싶다. 그렇다면 아래 노랫말은 어떤가. .....우리에 대항하여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이 일어났도다/ 들리는가 저 들판의 흉포한 적들이 우리 아내와 아이들의 목을 따기 위해 으르렁대는 소리가/ 무기
무심히 따라 불렀던 노래의 본뜻을 알고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라 쿠카라차가 대표적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데다 방송을 많이 타서 가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 병정들도 싱글벙글/ 빨래터의 아낙네도 우물가의 처녀도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후략) 라 쿠카라차(La cucaracha)는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라는 뜻. 원뜻을 붙여 보면 ‘바퀴벌레 바퀴벌레 아름다운 그 얼굴’ 이렇게 부른 셈이니 황당하고 우습다. 그러나 ‘바퀴벌레’가 가사 속에 들어간 사연을 알고 나면 웃음은 쏙 들어간다. 사연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격동의 과거사를 가진 멕시코를 알아야 이해된다. 마야문명과 아즈텍, 찬란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멕시코는 1521년, 스페인에 정복 당하면서 300년간 식민통치 받는 굴욕을 겪는다. (라 쿠카라차는 원래 스페인 민요로 스페인 상륙과 함께 전래되었다.) 1821년, 독립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 져 영토를 대거 빼앗기고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는가 하면 외국자본, 대지주와 결탁한 부패한 정부에 의해 노동자, 농민의 삶이 파탄지
‘월드뮤직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강의해왔지만 내 강의의 대부분은 음악과 음악인 이야기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역사 강의로 샐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쿠바의 관타나메라’ 를 소개할 때다. 중,노년층의 관심이 늘 뜨겁다. 그들은 70년대 3인조 그룹 세샘 트리오(‘나성에 가면’을 히트 시킨)의 목소리로, 청춘시절에는 미국 조앤 바이즈,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로 만났던 관타나메라를 추억 속에서 호출한다. 흑백 사진첩 넘기듯 아련한 눈빛이 된다. 노래 속 여인의 고향, 황백색 꽃 피는 종려나무 무성한 지구 반대편 섬 관타나모의 풍광을 전하면 ‘죽기 전에 언제 한 번 가보나’ 하는 동경의 눈들로 빛난다. 그러다 노랫말의 주인공, 쿠바 혁명가 호세 마르티 이야기를 하면 노래 이미지 반전에 충격 받는다.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와 미군 주둔 관타나모 기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알카에다 포로 수용소, 혹독한 고문 등의 뉴스를 떠올린다. 지금은 수교국이지만 60여년간 적국이었던 미국 포로수용소가 왜 쿠바 땅 관타나모에 있는지부터 질문이 쏟아진다. 관타나모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500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곳
파주 헤이리의 내 작업실을 찾아온 친구가 ‘기분이 울적하니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풍악을 대령하라기에 경쾌한 월드뮤직 음반을 골라 들려줬다. 두 세곡 뒤 쿠바 민요 ‘관타나메라’ 가 나온다. 제목만으로 바로 후렴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맞다. 그 노래. ‘호세 마르티 생각하면 이 노래를 목록에서 빼야 하는 거 아니야?’ 역사교사답다. 밝은 노래에서 어두운 역사를 바로 잡아낸다. 말 나온 김에 질문했다. ‘체 게바라는 유명한데 체 게바라의 영웅이었던 호세 마르티는 왜 그렇게 안 알려졌을까?’ 민중시각 역사교육, 세계시민의식 부재 이상의 탁견을 청했던 내 진지한 질문을 무색하게 한 답변. ‘외모 차이 아닐까’ 진심인지 유머인지 아직 확인 못해봤다. 호세 마르티는 몰라도 관타나메라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국정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마리카스같은 전통 남미 악기를 흔들며 노래하는 모습으로 방송도 많이 탔다. 노랫말을 모르고 들으면 리듬이 경쾌하고 중독성 있어 ‘휴가지에서 들으면 딱 좋을 노래’ 정도로 느껴진다. 제목 ‘관타나메라’도 ‘관타나모에 사는 여인’이란 뜻이니 가볍다. 그러나 스페인어 가사를 번역해 들여다보
일곱 번 본 영화가 있다. ‘인생은 짧고 볼 영화는 넘쳐난다’고 생각하는 내겐 이례적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개봉된 1962년 미국의 줄스 다신 감독이 만든 흑백영화 페드라(Phaedra)다. 라디오 심야방송을 즐기던 청소년 시절, 배경음악으로 처음 만났던 페드라는 강렬했다. DJ는 ‘남주인공이 사랑이 추락하자 인생도 추락하는 장면의 음악’이라고 소개했는데 바하의 파이프 오르간 음악 ‘토카타와 푸가’가 흐르는 가운데 절규에 가까운 독백이 나온다. (너무 많이 들어서 외워버렸다. 물론 영어다) ‘가자, 달리자!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추방되는 것도 영광이지 오, 세바스챤 바흐! 라라라~~ 굿 바이, 페드라, 그녀는 날 사랑했어. 죽고 싶어. 이제 스물 네 살, 라라라~’ 대학을 졸업하고 몇 해 뒤 종로의 한 영화관에서 재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첫날 첫회를 예매해 보았다. 엔딩 자막이 뜨고 관객 모두가 나간 뒤에도 혼자 감전돼 앉아있던 기억이 마치 유체이탈해 내려다본 듯 생생하다. 그리스 신화인 파이드라와 히폴리투스 비극에서 따온 계모와 의붓아들간 금기의 사랑 이야기도 강렬했지만 이를 맡은 여주인공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 扮)의 이 세상 여자 같지 않은 아름다움
미얀마 참상 소식 하나가 종일 뒷덜미를 잡는다. 지난 14일, 미얀마 양곤의 시위 도중 한 남성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죽여도 좋다는 군부의 지령을 받은 경찰의 총탄이 계속 쏟아진다. 돌연 물러나는 시위대 속에서 한 여성이 뛰어나와 남성의 몸을 감싼다. 이십 대 청춘이었다. 양곤 의대 1학년이라는 남성도, 생면부지 남성을 위해 총탄을 뚫고 몸을 던진 여성도. 남성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고 여성은 경찰에게 두들겨 맞으며 끌려가 소식이 없다. 어리고 여린 그들을 총탄 세례 앞에 서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질문에서 답을 얻는다. 어리고 여린 것이 힘이었을 것이다. 혁명가하면 만인을 이끄는 카리스마, 불굴의 정신 같은 것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세상에 이름 얻은 혁명가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게 다는 아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 ,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젊은 날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많다. 시인의 마음과 닮았다. 실상 시인들 가운데 혁명전선에 섰던 이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 시인으로는 김남주, 박노해, 김지하가 떠오르고 나라 밖으로는 혁명대열에 동참하다 정치적 망명까지 해야 했던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 스무 살 전후 시인을 꿈꿔 시인
택시 안에서 오랜만에 가곡 ‘비목’을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처연한 가락, 시 같은 노랫말에 끌려 즐겼던(?) 노래인데 지어진 사연을 알고 쉽게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됐다. 1960년대, DMZ 주변을 수색하던 육군 소위가 무덤 하나를 발견한다. 돌무덤 앞, 나뭇가지로 세운 비(碑) 위에 녹슨 철모가 걸려있었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 스러진 한 청춘이 첩첩산골 잡초 속, 이름도 없이 비목으로 남은 것을 보고 가슴 아팠던 소위. 훗날 방송국 음악 PD로 재직 중 그때의 심정을 떠올려 노랫말을 만든다. 비목 작사가 한명희(82) 전 국립국악원장 이야기다. 전쟁과 무명용사 애사(哀史)가 우리나라에만 있었겠는가. 비목을 떠올리게 하는 월드뮤직이 몇 곡 있는데 ‘백학’(Cranes)이 대표적이다.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 하는 육성 섞인 전주를 들으면 중년 이상 세대 상당수 사람들은 이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백학을 주제곡으로 썼던 이십여년 전 드라마 ‘모래시계’를 떠올릴 것이다. 70년대, 80년대를 소환해 5.18광주, 삼청교육대, YH사건 등 엄혹했던 시대를 다룬 드라마의 장중함과 비극성을 살리는데 배경음악이 한몫 했다. 그런데 노래 부른 이오시프
오월은 멀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 이 들린다. 노랫말의 모태가 된 시 ‘묏비나리’를 지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노동자, 빈민의 편에 서서 독재와 싸우고 통일 운동에 헌신했던 그의 족적이 노래의 장엄함을 더한다. ‘민중의 애국가’가 된 이 노래는 국경을 넘어 미얀마, 태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 독재와 탄압에 맞서는 시위현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아이돌 가요처럼 한류를 만든 민중가요다. 2년 전, 홍콩시민의 범죄인 송환 법안 반대 시위 현장에서도 불렸던 이 노래를 두고 한 신문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시아 각국에서 불리는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이라고 소개했다. 스텐카 라진도 낯선 단어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과는 또 무슨 관계일까. 스텐카 라진은 7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의 시위 현장에서, 더 멀리 가면 광복 전 독립군들 사이에서 불렸던 러시아 민중가요로 17세기 중반의 러시아 농민반란 지도자 이름이다. 우리나라 동학혁명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같은 존재이기에 그를 기린 민중의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도 비견된다. 러시아 남동쪽 국경지방인 카자크(Kasak)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스텐카 라진은 차르 폭정
죽음의 순간에 전 생애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지구 반대편 나라의 가수, 칠레의 빅토르 하라(1932- 1973)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월드뮤직을 접하기 전 먼 바람을 타고 전설처럼 흘러 내 귀를 스쳐갔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 청춘을 보냈는데, 우리처럼 군부독재탄압에 신음하던 칠레에 민중가수 김민기같은 존재가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20여년 전 체 게바라 열풍이 불어 거리에 그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넘치던 때, 어느 술자리에서인가 ‘칠레에도 체 게바라같은 대단한 존재가 있는데.....’는 말이 오갔던 기억이 있다. 월드뮤직에 빠지면서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접했고 노래를 찾아 듣던 중 유독 가슴에 꽂히는 곡을 만났다. ‘Manifesto’(선언). 감미로운 기타 전주 후에 나오는 미성의 달콤한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저변을 흐르는 슬픔. 회환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내가 노래하는 것은 목소리가 좋아서, 노래하기 좋아서가 아니지/내 기타도 이성과 감정이 있기 때문이야/내 기차는 대지의 심장과 비둘기의 날개를 갖고 있어/마치 성수와 같이 기쁨과 슬픔을 축복하지(중략)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가 아니야/내
노래를 듣다 가사가 쏜 살에 심장에 명중돼 숨 못 쉬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지. 월드뮤직 중에 노랫말이 기가 막힌 곡이 적지 않다. 오늘 소개할 아르헨티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의 ‘그라시스 아 라 비다(Grasias A la Vida)’ 도 그 중 하나다. 월드뮤직과 친해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언어다. 월드뮤직은 지구상 200개 넘는 나라의 7천개가 넘는다는 언어와 만나는 일이기도 해서 가사해석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월드뮤직과의 첫 만남의 호불호는 음률, 가수의 목소리, 노래 분위기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그건 가수와 음률이 마음에 안들면 바로 내쳐진다(?)는 얘기기도 하다. 월드뮤직에 빠지기 시작한 20여년 전 내 모습이기도 하고 그 초자의 거름망에 걸려 빠져나갈 뻔했던 위대한 곡이 있었으니 바로 앞에 언급한 소사의 노래다. 귀에 익은 듯한 음률도 살짝 씩씩한 목소리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패스. 그런데 나보다 앞서 월드뮤직에 빠져 전문가가 된 분들의 책을 보니 그녀의 노래에 대한 상찬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찾아 듣게 됐고 가사도 알게 됐다. 기억난다. 청춘을 막차에 태워 보내고 사랑도 일도 다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