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이라 한다. 우리가 태어나고 익숙하게 살아 온 이 땅을 젊은이들이 지옥이라 한다니 이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다. 다행이도 부모세대처럼 힘든 일제 강점기나 6·25를 겪지않아 전쟁의 참상과 어려움도 모르고 경제부흥기를 지나다 보니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나는 신기한 일을 많이 보며 자랐다. 언제나 발전했고 나아지는 것만 보아왔기에 꿈이 이루어 지는 것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꿈꾸는대로 뭐든 이룰 수 있었고 실제로 이뤄 나갔던 희망과 꿈들이 가득한 나라인데 그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지옥이라는 표현은 인정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개성껏 만들어 놓은 동영상들을 보다가 이런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을 발견했다. 우리나라를 여행하거나 학업 등의 일로 들어온 여러나라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생활하며 느낀 일상에 대해 자신들의 나라와 비교하여 말해 놓은 것이 그것이다. 한국에 익숙한 외국인도 더러 있겠으나 정확한 정보없이 왔다가 그들의 나라에는 찾기 어려운 한국만의 낯설지만 독특하고도 놀라운 문화를 경험하고 난 뒤에 말한 것이기에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외국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여러 나라의 시설이나 문화 그리고 관습을 조금이나마 직접적
‘어린이’를 떼고 나면 되는 것이 어른이일까. 몸은 이미 어른이 된지 오래지만 아직 정신적인 성숙이 그에 따르지 못하고 미성숙한 생각과 행동을 벗지 못하거나 스스로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말로 ‘어른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인류가 생겨났다. 어린 시절엔 어른이 공부도 안하고 결석하면 큰일나는 학교도 가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누리고 향유하며 자신의 삶의 형태에 대한 고뇌는 없이 어린이의 발랄한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며 횡포하고 있다 생각한 적이 있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어린이에게는 제약하는 세상의 모든 나쁜일을 누구의 제지도 없이 거침없이 내놓고 하는 뻔뻔한 배짱이 얄미웠지만 내심으로는 그런 방만한 자유가 부러워 얼른 시간이 흘러 어른의 대열에서 함께 그 모든 것을 누릴수 있기를 바랐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아버지의 능력과 노고로 아쉽지 않은 돈이 있었고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깨끗한 빨래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쾌적한 환경은 우리의 아무런 노력과 대가 없이도 늘 곁에 있었다. 가끔 어머니의 일방적인 취향으로 시장에서 사 오신 똑같지만 색만 다른 옷 두 벌 중에 여동생과 신경전을 벌이며 하나만 고를수 있는 제한된 자유말고는 어떤 책임에 대해서도 고
한 줄의 지문에 불과했지만 호아킨 피닉스가 6주간 감독과 고심한 뒤에 영화전반에서 최고의 장면으로 살아난 강렬한 컷이 있다. 빨간 양복에 광대 분장을 한 조커가 바닥모를 깊은 나락속에서 자신을 옭죄고 있던 답답한 현실의 껍질을 깨트린 기쁨으로 회색의 계단에서 내려오며 자신에 대한 해방감으로 가득한 몸짓으로 추는 춤이 그 것이다. ‘베트맨’영화에서 까닭없이 도시를 파괴하고 특별한 대상도 없는 분노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이해되지 않던 악의 대명사 조커가 이번에는 주위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평범하지만 우울 가득한 얼굴로 토드 필립스의 손을 빌어 우리에게 자신을 설명하려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한 웃음이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소망을 담아 해피라 불리며 자란 아서플렉(극중이름)은 절망으로 가득찬 고담시에서 광대를 꿈꾸며 존재감 없이 근근이 하류인생을 살고 있다. 과대망상을 앓는 병든 노모를 부양하며 희망조차 꿈꿀수 없는 답답한 하루를 살며 누구에게도 따뜻함을 건네받지 못하는 갈증이 화면에 가득하고 갑자기 터졌다가 순간 끊기는 그의 기괴한 웃음만이 섬뜩한 공포를 아슬아슬하게 전한다. 전작에서 트레이드마크였던 기괴한 그의 분장은 사실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
상상의 방이 있다. 어린이에게 꿈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동화가 있다면 어른에겐 꿈을 실현시키고 욕망을 채울 잔혹동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알라딘의 마법램프처럼 우리가 소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는 마법의 집 그리고 방이 등장한다. 주인공 케이트 역은 ‘007 퀀텀 오브 솔러스’와 ‘오블리비언’으로 익숙한 올가 쿠릴렌코가 그녀의 남편이자 남자 주인공 맷은 케빈 얀센스가 맡았다. 도시의 생활이 여의치 않아 집값이 싼 한적한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케이트와 맷은 그 집에서 벽지로 가려진 방 하나를 발견하고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자신이 소원하는 작은 것이 이루어 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은 그 방에서 자신들이 갖고자 했으나 어려웠던 물질과 삶을 마음껏 누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보이지 않는 규칙이 존재한다. 그 모든 것은 그 집안에서만 가능하고 유효했던 것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 그 곳에서 마음껏 소원하여 생긴 돈이 손에서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알게 된다.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무엇을 소원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가끔 질문하거나 혹은 받는다. 갖고 싶은 것은 더 나은 기종의 핸드폰이나 예쁜
“이 물건은 얼마시구요 저 옷은 얼마세요 모두 해서 얼마 내실게요. 안녕히 가실게요” 마트에서나 가게의 어떤 매장에 들러도 요즈음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물건이 사람보다 우위에 있고 사람처럼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듯 말하는 희한한 언어방식이다. 이런 말의 방식의 시작 즈음에는 언어의 오사용에 대해 말해 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색해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으며 자신에 대한 존대라고 받아들이는데 바르지 않은 말을 지적하자니 까칠하고 예민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대학 전공의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아는 범위에서 잘못된 방식이 귀에 거슬려 바른 사용을 권하려는 것인데 그렇게 느끼다니 혼자만 넘기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듣는 꼴이 되었다. 사물이 사람보다 높은 대접을 받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인가. 연장자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붙이는 ‘-(하,이)시다’라는 서술형 어미는 제대로 사용할 때도 한 문장 안에서는 한번만 사용하는 것이 규칙이라고 알고 있다. 형식적이고 진심없는 ‘-시다’를 과하게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사람이 불편하게 존대 받는 것인지 사물이 점잖게 존대를 받고 있는 것인지가 헛갈려 참으로 부담스럽다. 그렇게 사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씩씩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근래에 드문 일을 만난 나는 당황하며 “안녕하세요. 인사해 주어서 고마워요”라며 어색하게 답인사를 했다. 아이들이 자랄 때 낯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파트에서는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에겐 무조건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가르침이 주효했는지 아니면 아이들이 선한 사회의 영향을 받았는지 인사를 잘하며 자란 것 같다. 인사는 하는 순간보다 사실 받는 순간이 더 기쁘다. 그러나 인사를 기다리기 보다는 먼저 하는 편이고 인사를 할 때는 상대가 느낄수 있게 조금은 과한 액션으로 하는 편이라 나의 인사법에 주춤하는 이도 더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자연스레 맞추고 커다랗고 분명한 목소리로 경쾌함을 담아 나만의 방식으로 인사하는 법을 유지한다. 나의 간략하고 진심어린 인사로 상대의 기분이 좋아지기를 바라고 상대는 나에게로부터 존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려는 배려의 표현이다. 인사란 내가 가진 호의를 첫인상으로 갖고 다가가는 것이니 모호한 두려움을 갖지 않기를 바라는 몸의 언어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은 볼 수 없고 읽지 못하기에 우리는 타인에 대해
딸아이가 혼인을 한지 2년이 지나고서야 좋은 소식을 알렸다. 아직 중년의 젊음이 아쉬워 미처 보내지 못하던 마음에 비로소 종지부를 찍긴 했지만 기다리던 소식이라 함께 기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열 달을 오롯이 채운 2019년 4월에 드디어 건강한 대한의 건아를 만나게 됐다. 할머니가 되는 마음과 손주를 보니 기분이 어떠하냐며 아직 신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주위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채 대답할 겨를도 없이 우린 첫 손주의 이름을 짓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존재의미가 될 아름다운 이름을 고르는 일은 어려웠다. 훌륭한 삶을 사신 위인을 기리며 그의 궤적을 따를 인물이 되길 바라거나 잘생기고 성공한 연예인의 이름을 떠올려도 봤지만 그 아이의 일생과 함께 가야할 영원의 의미가 있기에 특별하되 특이하여 놀림 받지 않아야하고 신중하고 뜻 있어야 하되 과한 의미를 심지 않아야 하며 현대적인 시류를 따르되 가볍지 않아야 했다. 우리 아이 셋의 이름을 공부해 지은 경험이 있던 남편은 그날부터 작명 책을 들여다보며 첫 손주의 이름을 지어주는 시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그러나 진지하게 고심했다.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에 합의를 내고 하나의 이름을 결정해 주민등록부에
여행을 가면 새롭고 낯선 경치를 보며 즐거움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지역의 특별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긴 줄을 견디고라도 먹어보려 하고 자신이 찾아내고 맛있게 먹은 음식을 사진으로 남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자랑하는 것도 또 하나의 기쁨이 된다. TV의 많은 정보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맛집이나 낯선 곳을 여행할 때 기본정보가 없는 상태로 식사를 위해 간단하게 인터넷을 검색하면 ‘맛’이라는 글자를 채 완성하기도 전에 화면에 떠오르는 다양한 음식사진과 함께 여러 맛집의 소개 사진이 정리돼 있는 것을 본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내가 원하는 것에 맞게 고를 수 없었던 정보의 원시시기에는 그럴듯한 사진과 미사여구에 현혹돼 잘못 선택한 음식에 실망하기도 했다. 먹는 것을 좋아는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사진을 찍는 흉내까지만 내고 그리고 그 뿐이다. 그래서 기쁨을 나누려 한다거나 여러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젊은 세대만큼 적극적인 미디어 활용을 하지 않아 비슷한 연령대에서 즐길만한 음식 찾기가 어렵다. 유명 블로거나 홍보가 의심되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잘못 선택한 결과로 비싼 비용과 쓸데없이 부른 배 때문에 속 상한적도 많다. 자주 먹어서 익숙한 음
우리가 살며 맞닥뜨리는 스스로의 결정이나 타인이 내릴 판단에 대한 짐작은 생각대로보다 다른 결과로 나타나 놀라거나 의외였던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인간성을 하나의 단어로 단정 짓는 일은 섣부르다. 나의 인간성은 순정의 상태는 아니다. 태어나며 가진 본성에 더하여 배우고 체득한 교육이나 수많은 단련의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신념을 만들기도 하고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가치관으로 완성하기도 한다. 타인의 결정이나 행동양식을 미루어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사소하게는 그 사람의 취향을 짐작하여 선물하는 작은일 조차 타인의 취향에 결례가 될 수도 있다. 성선설 혹은 성악설 어느 쪽을 믿는가 하는 거창한 질문을 받고 까닭을 말해야하는 지점에서 태어나며 처음으로 표현하는 감정에 울음이 있음을 근거로 악(惡)을 말했다. 미소가 선한 것임을 전제로 했을 때 울음은 반대의 개념을 가진다. 자신의 첫 의사소통으로 내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는 울음인 것이다. 그것이 충분한 근거는 아니겠지만 감히 성악설에 한 표를 조심스레 얹을 수 있는 시작이 된다는 생각이다. 주변에 착한 이가 많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모르고 나도 착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남문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연로하신 분들이 젊은이들의 분주한 시간을 피해 다니시는 것을 자주 본다. 통증이 있어 보이는 관절을 힘들어 하며 느릿하게 걷고 시장에서 산 무거운 물건을 한보따리씩 들고 교통카드를 재빨리 꺼내지 못해 우물쭈물하며 정류장에서의 시간을 지체시키기도 하고 힘없는 팔다리로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 있기라도 하노라면 몸을 이기지 못해 넘어져 다칠까 노심초사다. 중풍이나 뇌경색으로 한 쪽 팔다리가 불편하기라도 하면 승하차에 자칫 위험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어디든 다닐 자유와 권리를 폄훼하거나 지탄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이 젊은이로만 구성돼 살아가는 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에 대한 불편하고 공평하지 않은 시설과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속도만큼 적응해내지 못하는 세대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노인은 젊은이들에게 걸리적거리는 존재라는 잘못된 편견의 씨앗이 되는 것은 아닌가 염려한다. 사회는 획일화된 구성원만으로 조직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한사람의 삶에도 한가지의 방식만이 적용되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장치해 놓은 다양한 계층의 보이지 않는 계급 중 나이가 주는 계급도 서열이 존재하는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