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랜드’가 좋은 영화라는 것,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가 신하균에게 하는 대사, 곧 “나 너 착한 거 안다”처럼 따뜻하고 착한 작품이라는 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또 동의하는 내용이다. 게다가 할리우드 전설의 영화감독 하워드 혹스가 얘기한 대로 좋은 영화란, 좋은 장면 세 개쯤이 있는 작품이라는 원칙 아닌 원칙을 적용할 때 ‘원더랜드’는 세 개 정도는, 아니 그 이상의 좋은 장면으로 차고 넘치는 작품이다. 그 점에 대해서도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17일 현재 전국 570,347명을 모은 수준으로 이 정도면 시쳇말로 ‘폭망’ 수준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원더랜드’의 이야기 축은 세 개이다. 아니 네 개이다. 중심은 해리(정유미)와 현수(최우식)가 이끄는 AI 여행사 원더랜드 팀이다. 이 둘은 죽어 가는 사람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그들 존재가 지닌 모든 정보를 사이버 상에 심어 놓고 앞으로 그를 그리워할 사람들, 그의 존재를 여전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 모두와 소통할 수 있도록, 그것도 쌍방향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도록,
슬쩍 극장에 나타났다가 겉치레로 상영을 하는 둥 마는 둥 사라진 영화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애당초 목표가 부가형 서비스 윈도우(VOD나 케이블TV, OTT)였을 것이다. 이제는 극장 상영작이 아닌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저어하거나 마다할 이유가 없는 세상이 됐다. 극장이든 비극장이든, 결국엔 어떻게든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만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전에 이런 영화가 있(었) 다는 것 정도 알고 있는 것은 손해 볼 일이 아니다. 물론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매우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VOD나 OTT로 보기에, 그렇게 시간 때우기용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떨어지는 작품도 아니다. 영화는 종종 재미로, 쉬기 위해, 그래서 일상의 활력을 얻기 위해 보는 것이다.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그렇게 머리를 쉬고, 리프레시(refresh) 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우리말 제목의 느낌대로 할리우드, 곧 LA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한 사립 탐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립 탐정은 뉴욕 같은 동부보다 LA, 캘리포니아가 많다. 미국의 동쪽은 춥고 서쪽은 따뜻하며 사람들이 친절하고 '루스'하다. 특히 할리우드는
김성훈 김독, 하정우·주지훈 주연의 영화 ‘비공식 작전’은 흥행 면에서는 치고 나가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첫 주 100만 안팎) 예상외로 활기찬 작품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이유는 1) 대체로 텍스트가 이해하기 쉽고 2) 1980년대 후반의 시대 묘사가 섬세하다는 점 3) 레바논 내전 당시 벌어졌던 실제 사건(도재승 서기관 납치 사건)을 드라마틱 하게 구성했다는 점 등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객들이 내심 이 영화에 크게 동화되고 있는 건, 1980년대 전두환 – 노태우 독재 시대 때 벌어졌던 국가적 사건과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 방식 등등이 2023년 현재의 정부 모습보다 훨씬 더, 백배 더 낫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 기이한 역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만약 지금 누군가, 재외국민이든 국내 해외여행객이든 납치나 재난을 당했을 때 현재의 국가나, 공무원 중 누군 가가, 영화처럼 구하러 나설 것인가. 과연 그럴 것인가. 영화는 종종 과거 일을 통해 현실을 일깨우게 한다. 기이한 깨달음을 준다. ‘비공식 작전’이란 영화 한 편이 지금 세상을, 전두환 시대 때보다 못한 현실로 깨닫게 할 줄은 이 작품의 감독이나 배우도, 이
안타깝게도 국내외 모두에서 흥행에 실패한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몇 가지 지점에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도 두드러질 만큼 아주 다른데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점이 제1의 요소는 아니다. ‘공주=흑인’은 차이라기 보다 비교적 단순한 특징, 캐릭터의 외모 설정에 불과하다. 인어공주가 흑인이기 때문에 내용이 달라지거나 극 전체의 톤 앤 매너가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피부가 까매서 처음엔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다가도 이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번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1989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와는 궁극의 지점에서 각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1) 원작과는 결말을 완전히 다르게 갔다는 것이고 2) 1989년 애니메이션과는 왕자의 캐릭터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왕자는 ‘백마를 탄’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갑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백성처럼, 일반 국민처럼 살아가려는, 그래서 ‘보통 사람의 정치학’을 깨달아 가려는 꽤 괜찮은 덕목의 지도자 청년으로 나온다. 심지어 왕자는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다. 외모상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는
극영화는 서사와 스펙터클로 승부를 한다. 이에 비해 뮤지컬 영화는 코러스로 승부수를 가져가려 한다. 솔로도 아니다. 뮤지컬 영화에서 가슴이 뭉클해질 때는 집단의 코러스가 나올 때이다. 2012년 겨울에 개봉돼 해외보다 국내에서 보다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레 미제라블’이 그랬다.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장발장의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 마리우스(에디 매드레인), 머리를 박박 민 판틴(앤 해서웨이) 등과 일군의 시위대들은 파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다. 그들은 결연하게 함께 소리를 외쳐 노래를 부른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아마도 이들은 이후 옥쇄(玉碎)를 했을 것이다. 그 느낌과 오라(aura)를 보여주는 마지막 코러스는 실로 사람들의 가슴을 친다. 윤제균의 신작 ‘영웅’도 그렇다. 언뜻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한일 합방을 주도했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김승락)를 암살하는 장면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하기 쉽다. 근데 그렇지가 않다. 그것도 전혀 아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서 훨씬 영화가 살았다. 영화의 여운이 오래간다. 그리고
영화 ‘본즈 앤 올’을 다 보고나면 여러가지가 떠오르고 기억날 것이다. 역시 ‘루키 구아다니노 감독이야’ 소리가 나올 것이고, ‘티모시 살라메는 왜 저렇게 해골처럼 말랐으며 저렇게나 살을 빼야 했을까’라고도 할 것이거나 ‘테일러 러셀 이 여배우 정말 신성(新星)이로군’하는 소리도 나올 것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두 연인의 식인(食人)하는 모습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끔찍해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매우 흥미로워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곧 나 같은 사람들)은 이들의 여정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게 더 특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주인공인 18살 식인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은 버지니아에서 시작해 오하이오의 컬럼버스인지 인디아나주인지에서 또 다른 식인 청년 리(티모시 살라메)를 만나, 함께 켄터키와 아이오아를 거쳐 미네소타의 퍼거스폴스란 병원에서 자신의 엄마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잠깐 헤어졌다가 네브라스카에서 다시 만나 미시간 앤 아버에서 잠깐이나마 정상적으로 정착해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곧 다시 식인의 사달이 난다. 지도를 놓고 보면 알게 된다. 이들이 다닌 거리가 얼마나 광대한 지역을 거쳐 가는지. 거의 2000㎞에 육박할 것이다. 그것도 편도로
공포영화는 세상을 읽는 척도다. 공포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그 표현 수위, 통용되는 방식, 관객의 수용 태도 등등은 그 사회가 지금 어떤 문제의 지점을 관통해 내고 있는 지를 가늠케 한다. 그래서 한때는 공포영화의 그런 진지한 태도가 싫다며 팝콘형 공포영화, 곧 그냥 즐기는 오락 형 공포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스크림’이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이 그랬다. 그러나 공포영화는 곧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 본래적 역할, 곧 사회의 메신저 역할을 해내곤 한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조금 좁게 치환시키면 공포영화를 보면 세상이 잘 들여다보인다가 된다. 감독부터 나오는 배우 대다수가 거의 ‘듣보잡’인 미국 영화 ‘스마일’이 쥐도 새도 모르게 1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홀연히 극장에서 사라진 것은 마치 공포영화 자체가 그렇듯, 소름 끼치는 일이다. 게다가 절대적 비수기라 불리는 기간에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 ‘스마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걸 보는 우리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마일’은 극도의 편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주인공 앞에서 깨진 유리로 목을 그어 자살했는데 그 순간 얼굴엔 기이한 미소를 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