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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자 지금, 누가 안중근인가. 당신인가?

93. 영웅 - 윤제균

 

극영화는 서사와 스펙터클로 승부를 한다. 이에 비해 뮤지컬 영화는 코러스로 승부수를 가져가려 한다. 솔로도 아니다. 뮤지컬 영화에서 가슴이 뭉클해질 때는 집단의 코러스가 나올 때이다.

 

2012년 겨울에 개봉돼 해외보다 국내에서 보다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레 미제라블’이 그랬다.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장발장의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 마리우스(에디 매드레인), 머리를 박박 민 판틴(앤 해서웨이) 등과 일군의 시위대들은 파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다. 그들은 결연하게 함께 소리를 외쳐 노래를 부른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아마도 이들은 이후 옥쇄(玉碎)를 했을 것이다. 그 느낌과 오라(aura)를 보여주는 마지막 코러스는 실로 사람들의 가슴을 친다.

 

윤제균의 신작 ‘영웅’도 그렇다. 언뜻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한일 합방을 주도했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김승락)를 암살하는 장면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하기 쉽다.

 

근데 그렇지가 않다. 그것도 전혀 아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서 훨씬 영화가 살았다. 영화의 여운이 오래간다. 그리고 이 작품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이 매우 영리한 선택을 했다는 점에 동의하게 된다.

 

특히, ‘영웅’은 이전 뮤지컬 공연 작품이 워낙 인기를 모았던 터이다. 그것을 영화로 리메이크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면밀하게 뮤지컬이 갖는 단점과 장점을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점은 당연히 서사(敍事)가 약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영화 역시 서사 중심이 되기 위해서였다면 드라마 전체를 점층적 구조로 이뤄 냈어야 했을 것이다. 안중근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라면 당연히 서서히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하얼빈 암살 장면으로 모든 기(氣)를 모아야 한다.

 

그러나 뮤지컬 영화라면 이야기보다 감정의 엑스터시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요소요소에 노래가 갖는 힘을 분산 배치시키되 그 리듬과 구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안중근(정성화)이 하얼빈으로 출발하기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진주(박진주)로부터 죽은 오빠(조우진)가 쓰던 모자(일명 뉴스보이 캡이라 불리는 것. 헌팅캡과는 약간 다르다)를 받아 들고 노래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 직전 진주의 대사는 이것이었다. “대장님. 거사에 꼭 성공하셔서 오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 주세요.”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에는 안중근의 장도를 마중하려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이들은 곧 안중근과 진주를 중앙에 놓고 양옆으로 마치 모세의 홍해가 나뉘듯 좍 갈라선다.

 

윤제균의 카메라는 그걸 풀 쇼트로 잡고 안중근과 마진주, 동지들인 우덕순(조재윤)과 조도선(배정남) 그리고 유동하(이현우)가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는 장면을 정면으로 잡아낸다. 이들을 따르는 무리들의 코러스가 이어질 때는 부감 쇼트로 전체 민중의 의지를 전달한다. 이 장면이 매우 좋다. 가슴을 쿵하고 치고 나간다.

 

실제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 전, 그 결단의 순간이 얼마나 살 떨렸겠는가. 그걸 혼자의 의지만으로 극복했겠는가. 얼마나 큰 공포에 시달렸을까. 얼마나 그 위험한 독배를 피하고 싶었을까. 그래서 한편으로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을까. 안중근을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그 모든 갈등의 순간과 위기를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꼭 혼자만의 힘이었겠는가. 안중근이 혼자라고 느꼈으면 과연 ‘거사를 거사로서’ 끌고 갈 수 있었을까.

 

 

김훈의 문학 ‘하얼빈’은 바로 그 ‘개인의 위대한 결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소설은 기이하게도 여백이 많게 느껴진다. 작가 김훈은 안중근의 항쟁이 꼭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음을 간파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여백을 많이 남겨 놓았다. 작가 김훈은, (그 민중의 뜻과 힘을)굳이 서술하지 않을 테니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생각하고 역사적으로 상상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훈의 의도는 적중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만들어진 의미의 골짜기를 통해 사람들은 안중근이되, 안중근이 아니었던 것을 추론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이 혼자의 힘으로 거사를 치렀지만 그 위업은 안중근만이 아니라 그 뒤에 민중들의 도도한 흐름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데 영화는 소설의 문장이 갖는 그 같은 오라의 힘을 시각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문학이 갖는 추상성,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윤제균의 영화 ‘영웅’은 김훈이 소설 ‘하얼빈’에서 의도적으로 그려내지 않았던 민중의 힘을 정중앙에 배치한다.

 

바로 그 점이야 말로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이다. 안중근의 독립운동은 개인만의 결단이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따른 것이었음을, 그 거대담론의 시각을 보여 주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영화 ‘영웅’의 주인공은 안중근이 아니라 안중근을 뒤에서 밀어주고, 또 안중근이 주도적으로 끌고 나갔던 민중과 시대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 암살 장면의 스펙터클, 그 서스펜스보다는 민중 전체를 보여 줘야 했을 것이다. 거기에 방점을 찍어 줘야 한다고 윤제균은 생각했을 것이다.

 

몹 신(mob scene), 코러스 신의 또 하나의 압권은 마지막에서 한 번 더 나온다. 그리고 그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그건 안중근의 법정 신이다. 일본인 판사는 그에게 묻는다. “안중근, 너는 왜 이토를 죽였는가?” 안중근은 이에 대해 “(과연) 누가 죄인인가?”라는 말로 화답한다. 재판정에 함께 앉아 있는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재판정 밖, 안중근의 아내(장영남)와 동생 안정근 등 무리들이 연신 ‘누가 죄인인가’를 후렴으로 소리 높여 외친다.

 

안중근은 그 후렴에 힘입어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그가 천명했던 동양 평화사상의 실체와 허구, 자신이 주장하는 대체 이론들 등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들을 낱낱이 그리고 샅샅이 열거한다.

 

 

마치 래퍼들의 속사포 가사처럼 안중근은 일제의 역사적 과오가 얼마나 큰 것인 가를 웅변한다. 안중근은 곧 죽을 것이고 우리 모두 그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이 법정 신은 안중근의 독립운동이 사람들, 민중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각인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영웅’의 후반부에 이르는 이 장면은 톰 후퍼의 ‘레 미제라블’이 보여 줬던 마지막 바리케이드 장면을 연상시킨다. 법정 안과 밖을 리드미컬하게 교차해 가며 그려 낸 코러스 신은 ‘영웅’에서 압권 중의 압권이며 최고의 장면이다.

 

뮤지컬 영화가 갖는 강약의 흐름, 그 완급의 조절, 뺄 건 과감하게 빼고 드러낼 것은 완벽하게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 등등 영화 ‘영웅’의 연출은 매우 스마트한 선택과 집중을 해냈다.

 

무엇보다 안중근을 바라보는 인간주의적 시선이 흥미롭다. 윤제균은 다소 과도할 만큼 안중근이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음을 강조하려 애쓴다. 옥중 교도관에게 안중근이 자신은 일본을 싫어하지 않으며 일본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 같은 것이다. 자칫 친일적 시선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사상의 핵심인 사해동포주의를 보여 주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영화가 중간중간 코믹한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는 것도 안중근의 일상이 꽤 인간적인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혁명은 영화처럼, 때론 웃고 우는 일상의 모습 그대로 진행될 때가 많다. 엄숙주의는 역설적으로 위대한 혁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윤제균은 안중근이 웃으면서 위업을 달성했고 웃는 순간을 통해 공포의 순간들을 극복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단순하게 영화를 재미있게, 상업적으로 성공시키고 싶어서였거나. 모든 것은 균형의 문제이다. ‘영웅’에서 그려지는 코미디 코드가 그렇게 과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민비(이일화)에 대한 정치적 시선이 다소 평면적이었고 그것이 결국 ‘설화(김고은)’라는 캐릭터의 행동 동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해도, 민비가 정치적으로 추악했던 측면(청과 일본 등 외세를 개인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려고 끌어들인 점,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하느라 청일전쟁을 유도한 점 등등. 안중근도 초창기, 동학농민운동 부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었다. 그가 민중주의를 올바로 깨달은 것은 그 이후로 보인다)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그녀가 진정한 국모였다는 이미지만 강하게 남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점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는 역사에 대한 인식과 서술에 있어 어차피 다소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에 있는 몇 가지의 핀을 뽑아내는 것이다. ‘영웅’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기대 이상의 감정적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좋은 평론은 영화를 보게 만들고 싶게 하는 것이다. 좋은 역사 영화는 당시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지금의 현실에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영웅’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안중근과 그의 독립운동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어쩌면 영화 ‘영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안중근을 만들어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웅’을 보고 있으면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꽤 도발적인 작품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 지금 누가 안중근인가. 누가 불의에 맞서 거사를 준비 중인가. 바로 당신인가? 영화의 총구가 당신들에게 겨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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