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고와 인천고는 50∼60년대를 풍미한 야구명문이다. 인천 고교야구의 양대 산맥인 이들 학교가 당시 봉황대기와 청룡기를 번갈아가며 석권해서다. 특히 동산고는 1955년부터 3년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제패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 제물포고가 가세하며 인천을 야구의 도시 반열에 올려놓았고 이때부터 인천이 구도(球都)라는 애칭을 갖게 됐다.
인천야구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야구의 역사와 다름없다. ‘한국야구사’를 보면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는 황성기독교청년단 회원들에게 격구(擊球)라는 이름으로 야구를 가르쳤으며 이듬해인 1906년 독일어학교팀과 야구경기를 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야구 경기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6년 앞선 1899년 인천고 전신인 인천영어야학회학생들이 했던 베이스볼이라는 서양공치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라는 게 정설로 되어있다. 그 근거로 당시 1년 재학 중이던 후지야마 후지후사라는 학생이 자신의 일기장에 서양공치기인 베이스볼을 즐겼다는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인천야구는 활발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경인기차 통학생들로 구성된 한인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漢勇團)의 주활동 무대도 인천이었다. 당시 웃터골(현 제물포고 자리)에서 일본인과 자주 야구경기를 가졌고 그때마다 국민들의 울분도 달래줬다.
해방 이후에도 인천은 야구의 메카였다. 사회인야구의 효시인 전인천군(全仁川軍)이 조직돼 전국대회를 휩쓸며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70년대 잠시 침체기도 맞았지만 80년대 들어 프로야구출범과 함께 인천은 구도(球都)로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비록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지금의 SK 와이번스까지 다섯 번이나 연고팀이 바뀌었지만 오히려 ‘짠물야구’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여러 차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명예를 되살린 것이다. 지난해엔 단일 시즌 100만 관중 돌파라는 기록도 세웠다.
동산고 출신 미 프로야구 LA다저스 류현진 선수가 고향 인천에 야구장을 만든다. 그곳에서 사비를 들여 야구 꿈나무들을 키우고 나아가 수도권 아마추어야구의 산실로 거듭나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덩치만큼 인천야구에 큰 버팀목으로 성장한 류현진. 몬스터라는 별명이 오늘 따라 더욱 친근하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