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달궈지는 속도로 들판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담장에 걸쳐진 호박은 속절없이 붉어지고 과수원 철망을 빠져나온 단내가 날것들을 불러들인다. 바삭하게 마른 고추를 손질하는 노파의 손길 뒤로 바지랑대에 앉은 고추잠자리만이 한가롭다.
텃밭,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린 고추는 보는 것만으로도 풍성해진다. 잘 익은 고추 몇 개 따서 찬밥에 물 말아 고추장에 푹 찍어 먹으면 입안이 얼얼하면서도 달큼한 고추 맛에 먹고 또 먹던 생각을 하면 침이 고인다.
막 들기 시작한 고구마 밑을 파서 주먹만 한 고구마를 캐기도 하고 설익은 콩을 아궁이에 구어 입이 새까매지도록 까먹으며 서로 바라보고 낄낄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귀밑머리 희끗한 세월이 되어 그때를 회상한다.
얼마 전 동해에서 서해로 해안가를 따라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했다. 영덕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물놀이를 하던 중 일행이 슬그머니 나가더니 옥수수 한 망을 사와 군불을 피우고 거기에 옥수수를 구웠다. 반은 익고 반은 타고 설익은 옥수수를 뜯어먹으며 서로 쳐다보고 웃고 난리도 아니다.
다리 밑에서 머리에 수건 두르고 입 언저리는 시커멓고 며칠째 노숙을 하다 보니 꼴은 엉성하고 여전 드라마 속 거지왕 춘삼이 오빠다. 웃고 떠들며 즐기고 있는데 근처에서 천렵 하던 중년이 옥수수 몇 자루만 달라고 했다.
이 동네 주민인데 아이들이 너무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나마 잘 익은 옥수수를 불구덩이에서 꺼내 주었더니 가마솥에서 막 지은 흰 쌀밥 한 바가지와 방금 물가에서 잡아 끓였다는 매운탕을 한 냄비 얻어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적당히 매콤하면서 담백하고 푸짐하면서 시골의 정서가 듬뿍 담긴 투박한 맛의 매운탕과 가마솥에서 막 지어낸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구수하고 곱슬곱슬한 밥. 벼 타작 하던 날 어머니가 마당에 가마솥 걸고 하시던 그 맛이다. 밥을 퍼내고 나서 적당히 눌은 누룽지를 놋쇠 주걱으로 삥 둘러 꺼내놓으면 간식으로 뜯어 먹던 그 잊을 수 없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가고 있다. 요즘은 먹고 입고 노는 일들이 다양해지다 보니 좀 더 색다른 문화를 체험하길 원하고 남보다 다른 정서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는 아직 시골에 있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초스피드의 문명보다는 유년에 대한 기억들이 더 아련하고 간절하다.
쪽대로 물고기를 잡고 도랑에서 멱을 감고 콩서리를 하다 들켜 쫓겨나기도 하고 이집 저집 몰려다니며 밤이 이슥하도록 수다를 떨며 십 대를 보냈다. 콩 타작하는 날은 마루 밑이며 외양간에 들어가 콩을 줍고 엿장수 가위질 소리가 들리면 집 안팎을 뒤져 고물을 챙기던 성장의 한때가 지나쳤다.
울타리 밑의 머루가 익어가는 속도로 가을이 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저 언덕으로 들판으로 쏘다니며 해바라기가 까맣게 익으면 까먹고 수확을 끝낸 과수원에 들어가 이삭을 줍다 보면 된서리가 내리곤 했다. 계절의 속도만큼 내 삶의 속도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가을 들녘에서 읽는다. 이 가을 멋진 나날들이 되길 소망하면서.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안견문학상 대상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