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당연히 안정화되어야 한다. 안심이 되어야 평화가 있는 것이고 그러해야만 믿음이 생겨 사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그 신뢰의 끝은 안심이요 평화다. 우리는 사회생활하면서 이 점을 간절히 추구하고 있다. 나는 사회를 믿어야 하고 나 자신은 우리 사회에 믿음이 가게끔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안팎으로 평화가 깃든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 해는 저물어 가는데 사회는 불안하다. 불안은 불신에서 비롯한다. 소망 없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불신하다 보니 상대를 바라보며 손가락질만 해댄다. 현재 사회적 갈등구조가 서로 충돌하여 양보 없는 자세가 마치 벼랑 끝에 선 절망적인 사람처럼 처신한다. 절망에 선 사람은 살고 싶은 소망마저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에 벼랑 끝자리에 선다.
그런데 어떤 그룹들은 정략적으로 극한대치 법을 구사한다. 매파니 비둘기파니 하면서 자신들의 투쟁력을 과시만 할 뿐 진정으로 신뢰할 수 없는 언행 등을 한다. 각각의 기관별로 조직별로 자신들만의 생존을 위해 가다보니 사회는 불안만 조성된다. 신뢰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오호 애재(哀哉)라. 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불행한 일인가.
신뢰는 평화요 불신은 불안이다. 우리는 불안을 원하지 않는다. 당연지사(當然之事) 불신을 제거해야 한다. 사회적 정의가 분명히 바로 서야만 우리 사회는 신뢰받는 사회가 된다. 그 사회는 그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성원들인 우리가 정성을 들여 만들어가는 것이다. 당리당략이나 정파별로 사회적 정의(正義)가 정의(定意)된다면 그야말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오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정(定)한 이치다.
사람이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사는 것은 하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함이 없다. 햇빛은 빈자와 부자, 강자와 약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저 온 누리에 빛을 내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늘은 공평하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은 공평한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적 정의는 더욱 그렇다. 사람은 음침한 골짜기에서 권모술수 부리는 것을 본성적으로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정의적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지 않는가?
이 사회의 정의적 가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면 그 즉시 그 사회는 소망이 없다. 신뢰가 없으니 평화도 없다. 불신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으니 불안할밖에 없다. 사회적 정의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경제적 ‘성장’이란 말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분배’ 또한 가련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가진 자들의 시혜(施惠) 의식 외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세상이 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불행하게도 불신은 불안을 낳는다.
사회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야만 믿고 의지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이 아닌가? 특히 ‘정치사회’에 대한 신뢰가 하루속히 회복되어 정의와 공정인 ‘공의로움’의 사회가 도래(到來)하기를 소망한다.
▲고려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경기예총 2012년 빛낸 예술인상 수상 ▲한광여중 국어교사 ▲전 (사)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 지부장 ▲시집-『카프카의 슬픔』(시문학사·1992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