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오래된 친구가 세상을 떠나, 다른 이들보다 일찍 상가(喪家)에 앉아, 쪼그리고 앉아, 둘만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차마 돌도 되지 않은 핏덩이를 남기고 발걸음이 떨어지더냐, 부터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망자(亡者)와의 대화가 좋은 건 내가 끝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컥컥, 무엇인가 목젖을 계속 쳤다. 여럿이 모여 망자보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열중하는 분위기가 싫었던 터라 다른 문상객이 오기 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돌이켜보면 오래된 화두(話頭)였다, 죽음은. 적확한 삶의 진실인 그 벽을 넘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에게 기대기도 했다. 해탈의 달인이었으니. 그런데 그는 내게 답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불립문자(不立文字)니까. ‘스스로 알아서 가라’가 다였다. 당신은 이미 강을 건넜으므로 너는 스스로 배를 만들어서 넘어오라, 뭐 그런 이야기겠다. 밤이면 죽음의 신이 올까, 두려워 거리를 떠도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일까. 그렇게 죽음은 생방송이었다. 이순(耳順)이 가까워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런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임종(臨終)의 순간을 생방송으로 불립(不立) 아닌 문자(文字)로 중계하는 이가 있어 혼돈(混沌)이다. 언젠가 마음을 보냈던 ‘시바, 세상을 던져’의 감독 이성규다. 간암 말기인 그는 지금 신촌 세브란스를 떠나 춘천의 한 호스피스 병동에 머물고 있다. 지난 새벽 그가 올린 글이다. 허락 없이 게재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허락된 시간이 그런대로 충분한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아니네요. 내가 살아갈 하루의 숫자가 줄어든 기분. 아직은 훌쩍훌쩍 울곤 합니다만, 임종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두려운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과정일 겁니다. 죽음의 과정이 내게 축제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는 축제 현장에서 놀고 있어요. 재미나게 놀고 싶어요. 그리고 ‘안녕’이라 님들에게 인사하고 싶어요.”
한 영혼의 떠남은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의미에서 축제다. 망자(亡者)의 초대. 주체는 없고 객체만 슬펐다가 시시덕거리는 그런.
오늘도 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이 감독, 그대의 생각을 존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