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에 소주를 조심스레 따르면 위로 맑게 떠오른다. 18세기 선비들은 이를 혼돈주(混沌酒) 혹은 자중홍(自中紅)이라 부르며 즐겼다고 한다. 혼돈주는 당시 대표적인 문인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1730~1781)가 소주 한병이 생기면 막걸리를 받아 섞어 마셨다는 기록에서 유래된다. 석치는 청나라에서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사대부들이 가졌던 사고의 혼란을 섞은 술에 비유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폭탄주인 셈이다.
폭탄주는 1900년대 초반 미국 부두, 벌목장, 광산의 종사자들이 고된 노역의 고통을 잊으려고 맥주에 독한 양주를 섞어 마신 술 이름이다. 보일러메이커(boiler maker)라고도 불리는 이 술은 ‘마시면 온몸을 취기로 끓게 하는 술’이란 뜻으로 많은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몬태나를 배경으로 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도 폭탄주가 나온다. 웬만한 술꾼들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브래드 피트가 형 크레이그 셰퍼를 데리고 마을 술집에 갔다가 실연한 형이 ‘위스키믹스’를 시키자 바텐더가 맥주가 가득한 잔에 위스키 잔을 빠뜨려 건네는 장면에서다.
노르웨이나 스웨덴 등 북유럽에는 ‘잠수함(Submarine)’이라는 폭탄주가 있다. 500CC 맥주잔에 독일 술 ‘슈납스’를 담은 잔을 떨어뜨려 마시는 술이다. 떨어뜨린 잔이 맥주에 들어갈 때 꼭 잠수함이 입수하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 소개돼 애주가들이 즐기고 있는 폭탄주 제조의 원조(元祖)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박희태 전 국회의장설이 유력하다. 1983년 춘천지검장 시절 관내 기관장회의 술자리 때마다 군인들이 위스키를 맥주잔에 가득 따라 돌렸다. 견디기 힘든 일반 참석자들의 원성(?)이 잦자 박 전 의장이 “위스키 반, 맥주 반을 섞어 ‘강원도민주’로 이름 붙이고 마시자”고 제안한 것이 폭탄주의 시초가 됐다는 것이다.
연말을 앞두고 갖가지 술자리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 대세인 ‘소맥’을 비롯 방법도 가지가지인 음주를 자칫 잘못 관리하면 정신 줄까지 놓아버리기 십상인 그런 시기다. 적당함을 망각한 채 술 폭탄에 취하고 혼돈의 늪에 빠진다면 차라리 마시지 않음만 못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