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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일칼럼] 숨어있기 좋은 방

 

소설가 박범신 씨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서로 맡고 있는 일이 있어 빈번하게 만나지는 못하는 처지지만 그래도 50년 지기의 막역한 사이여서 만날 때마다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받곤 한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에 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자기가 살 집을 직접 짓게 된 박범신은, 집을 짓는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무조건 집을 환하게 해 주세요. 집 안의 모든 곳에 햇빛이 쫙 쫙 잘 들게 해 주세요.” 그러자 설계를 맡은 이가 가로막고 말리더란다. “집이란 곳엔 그늘도 있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전까지, 가난 때문에 너무나 고생이 많았던 그는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물리지 않았단다. “내가 지금 이렇게 속이 좁은 건, 어렸을 때 좁고 어두운 방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젠 무조건 햇빛이 잘 드는 환한 곳에서 지내고 싶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도 밝고 품이 큰 사람으로 자랄 것이 아니냐.” 박범신의 부탁이 워낙 강경하고 나름의 사정도 있어 보여, 설계사는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설계를 해주었고 집도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사방이 틔고 창이 넓은, 환한 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과 달리 조금씩 부모의 속을 썩이기 시작하더란다. 어린 시절 좁고 어두운 방에서 지낸 기억에 진저리가 나서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환하고 밝은 자리를 만들어주려던 마음을 아이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 같아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더란다. 그래서 아이들 생각에 이래저래 힘들어 하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심리학 전공의 또 다른 친구가 이런 조언을 했다고 한다. “집에 창이 많고 그 창이 너무 넓어서 그래. 그렇게 환하기만 하면 아이들의 심리가 오히려 산만해질 수도 있거든. 우리 어렸을 때를 생각해봐. 집이란 숨바꼭질하기에 좋은 다락방도 있고, 오만가지 잡동사니가 쌓인 창고 같은 방도 있고, 좀처럼 사람들이 문을 열지 않는 골방 같은 좀 어두운 구석이 있어야 사람 사는 집이지. 자네 집은 도무지 숨을 데가 없잖아. 아이 방을 좀 바꿔봐.” 그제야 그는 무조건 사방 햇빛 환한 집만을 고집했던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이에게는 환한 창문만이 아니라 ‘숨어 있기 좋은 방’도 하나쯤을 필요했다고 말이다. 소설가 박범신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춘 것만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로 그날의 자리를 마무리했다.

박범신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밝고 환한 것만이 좋은 것이고, 힘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둡고 힘든 것도 그것들 못지않은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그동안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눈부신 밝음뿐만이 아니라 다락방처럼 깜깜한 어둠도 함께 했던 집이나 가족, 나 자신의 마음이야말로 실은 나의 성장에 가장 좋은 조건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둠은, 감추고 싶은 상처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빈자리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열등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어둠과 그늘에서 벗어나서 살 수는 없다. 꽃과 나무, 들판의 짐승들에게 환한 낮만 있다면 그것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듯이 말이다. 사람은 밤과 같은 어둠 속에서 불안과 초조를 가라앉히고, 휴식을 취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고요하게 만들어야 환한 낮을 지낼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갖출 수 있다. 제 안의 어둠과 그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당당하게 극복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와 아량을 더욱 넓힐 수도 있다.

사람의 일생은 무수한 슬픔과 고통으로 채색되어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슬픔과 고통에 의해서만 사람은 구원받고 위로받게 된다. 슬픔과 고통은 또 하나의 풍요로움이고 에너지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숱한 고비가 있다. 맞서 싸우기 힘겹거나 차라리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숨어있기 좋은 방’에 들어가 숨을 고르고, 바깥의 발자국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문을 열고 세상을 나갈 순간을 가늠해야 된다. 어둠과 그늘, 고통과 슬픔은 결국 ‘숨어 있기 좋은 방’이며,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세상 끝의 등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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