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매서운 추위에 온 나라가 꽁꽁 얼었다. 겨울 초입에 내린 폭설이 아직도 녹지 않고 양지와 음지를 가르며 얼룩무늬를 만들고 있다.
세월에 가속도가 붙어, 새 달력을 걸기가 무섭게 택시 미터기처럼 숫자가 바뀐다. 1월 말일이 설날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다. 귀성 차들이 막히기 전에 부모님 산소에 한 번 다녀오면 그만이다. 부모님이 기독교인이라 차례가 없어,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이다. 두 아들이 외국에 살고 있고 세뱃돈 달라고 손 내밀 손자도 없다. 설날이나 추석이면 더욱 짙은 외로움이 온 집안을 싸하게 채운다.
은퇴 후, 수도권의 농촌마을에 자리 잡아 수년째 살고 있다. 옛 고향은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사람들은 물론 산천조차 낯설어진 지 오래다. 이곳도 설날이면 이웃집 마당에 자녀들의 자동차가 하루쯤 머물다 가는 것 외에는, 어디에도 다른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보름날 마을 어르신들이 회관에 모여 식사와 술, 윷놀이로 하루를 즐기는 정도이다. 설날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내와 산책을 나서지만, 먼 그리움은 어쩌지 못한다.
6·25 동란으로 부서질 수 있는 것들은 다 부서지고 불탔지만, 오직 땅은 남아있어 다시 농사를 짓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아끼고 주려도 설날이면 쌀밥을 짓고 막걸리도 빚어 차례를 지내며 새 희망을 키웠다.
대가족들이 모두 모인 설날 아침, 대청마루에 음식이 차려지면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서 추위에 떨며 어른들을 따라 차례를 지냈다. 다음은 조부모님과 백부님, 부모님에게 세배를 드렸다. 아침식사를 끝내면, 조부모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러 마을사람들이 찾아온다. 우리도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러 다녔다. 집집마다 음식과 막걸리를 내어 놓는다. 부녀자들은 뒤집은 개다리소반에 음식을 담아, 머리에 이고 이웃 어른들에게 갖다 드린다.
양지바른 곳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제기차기, 자치기, 연날리기, 팽이치기와 썰매타기로 손이 어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윷놀이와 처녀들의 널뛰기로 온 동네가 떠나간다. 놀이는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지며, 마을 사물놀이패들이 사람들을 몰고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을 밟는 농악은 축제의 정점을 이룬다. 대보름날 오곡밥을 먹고 귀밝이술을 마시며, 달집태우기를 끝으로 보름간의 들뜬 설에서 일상으로 돌아온다.
급속한 산업화는 도시화와 더불어 핵가족 시대를 열며, 우리 고유문화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설날은 단순한 연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국내외 여행지에서 보낸다. 심지어 관광지 콘도에서 합동 차례를 지낸다고도 한다. 젊은이들은 우리의 풍습이나 자신의 뿌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고유의 미풍양속이 점차 사라지면서 더불어 우리의 정체성과 윤리, 도덕도 실종되는 것 같다.
글로벌 시대에 ‘고유의 전통이 잘 보존되고 있는 한국’, 가장 세계적이고 현대적인 가치가 아닐까. 소중한 것들을 되찾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정책이 있어야겠다.
▲월간〔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한국문인협회가평지부장 역임 ▲수필집: ‘남쪽포구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