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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회복과 구원

 

삶은 갈등의 연속이며 세상은 크든 작든 갈등적 사건이 발생한다. ‘나’ 개인의 삶이 그렇고‘너’ 개인의 삶도 그렇다. 이러한 ‘나’와 ‘너’의 개인적 삶은 ‘나’와 ‘너’의 부딪침으로 사건화 된다. 온통 사건으로 뒤덮인 것이 우리 사회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역동성이 있다고들 한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엔 생명도 있고 죽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사회의 지향점은 죽음이 아닌 생명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죽음으로 향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 사건 현상들을 잘 살펴보면 파멸의 밑바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사건들이기에 굳이 애써 외면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사건들이라면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 생명과 존엄성이 황금으로, 물질로 치환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걱정도 되고 우울하기까지 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正義)’가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실종되어가고 있다. 정의를 외치는 반정의적 사회·모순적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볼 때, 과연 우리의 진정한 미래는 있는 것인가? 하고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진정으로 회복을 해야 하는데, 그 회복의 당사자는 물론 사회로부터 당한 피해자들이 되는 것인데, 그러나 희한한 것은 가해자들도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해자인 그 개인도 회복의 대상자가 되어 피해자의 줄에 슬그머니 들어선다. 그래서 가해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회만을 탓한다. 웃지 못 할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어느덧 가해자가 되어 있다. 우리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사회를 탓하면서 가해자들은 자기합리화를 꾀하며 피해자 속으로 숨어버렸다. 참으로 비겁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정의가 실종되다 보니 동시에 개인적 양심도 함께 실종되었다. ‘내 탓이요’가 아니라 ‘네 탓이요’이다. 사회는 그야말로 개념이다. 실체는 없다. 그런 사회에 책임을 전가한다. 진정 회복의 길은 요원(遼遠)하기만 한 것인가?

회복은 참회를 전제로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성을 회복하고 존엄한 인간 생명의 가치를 생각하며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 비로소 우리 사회는 회복된다. 가해자는 참회를 통하여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해야 하며 그로 말미암아 피해자는 회복이 될 것이며 그래야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된다. 물론 피해자에게 그 피해 사실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지만 용서는 해 줄 수도 있다. 그래서 회복을 매개로 한 정의는 실현된다. 양심도 회복된다. 그래서 사회는 그 당사자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실존적 측면에서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걷게 된다. 미래에 대한 소망과 아름다움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은 구원을 이뤄야 한다. 현실적이든 초현실적이든 구원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 각 개인들은 진정으로 참회를 한다. 그 참회는 엉클어지고 뒤틀리고 왜곡된 진실들이 온전히 제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관용과 배려하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과연 미래가 있겠는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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