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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부용지(下)

 

정조시기 부용지의 명칭은 태액지였다. 이 지역에 최근 복원된 취병(생울타리)이 있는데 취병에 대해 전편에 이어 살펴보자. 태액지와 규장각의 영역구분은 취병으로 돼있지만 규장각이 높은 위치에 있기에 시선마저 차단되지 않고 조경의 요소로만 인지되고 있다. 그리고 취병의 길이를 태액지 중심을 맞추고자 태액지보다 긴 동서측편이 취병은 뒤쪽으로 후퇴시켰다.

규장각도를 보면 태액지가 규장각의 진입공간 역할로 보인다. 규장각의 주 진입로는 창덕궁의 국왕 공간에서 영화당을 거쳐 태액지 영역을 들어와 어수문을 통해 규장각으로 가는 것이 정례로 보인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만든 규장각도(奎章閣圖)를 통해 정조의 즉위 초기 태액지 조경에 대해 살펴보자. 태액지의 4방향 영역구분에 있어 담장은 동북쪽만 있고 남서쪽에는 급경사지를 이용하여 담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쪽 담장은 영화당에 붙어 있으며 여기에 대문과 영화당 기단에 붙은 작은 협문이 있고, 북쪽은 규장각과 사이에 취병과 어수문이 있다. 태액지의 영역구분 방식에 있어 동쪽에만 정식 담장을 하고, 북쪽은 생울타리담을 설치하고 나머지 두 곳은 자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해 경제적이면서도 친환경적 계획을 하였다.

태액지는 방형이고, 섬이 원형인 것은 옛날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 사상을 적용한 것이다. 태액지의 원도(圓島)에는 원형 석축 위에 난간이 설치되어 위험을 방지하고 있으며 난간 안의 공간에는 절병통이 있는 둥근 지붕이 있는데 기둥이 표현되지 않아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선행연구에는 청서정이라고 추정한 것과 침엽수라 추정한 것이 있다. 규장각도를 자세히 보면 우산 형태의 둥근 지붕이 다른 부분의 나뭇잎 색깔과 질감이 같아 보인다. 또 나무를 다듬은 취병과 비슷한 질감도 보여 큰 나무를 다듬어 그늘 집을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그럼 나무의 종류는 무엇일까? 그늘을 만들기에는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유리하고, 활엽수 중에서 물가에 잘 자라는 나무일 가능성이 있는 버드나무다. 또한 정조가 1793년에 짓은 ‘부용정 상량문’에 ‘버들 섬과 꽃 제방 일제히 나지막하게 보인다(柳嶼花堤一望低)’가 나오는데 태액지 안의 섬을 ‘버들 섬’으로 표현하고 있어 규장각도(1776)에 보이는 나무가 17년 후 부용정을 만든 1793년까지 살아있어 계속 버들 섬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동궐도(1828~1830년 제작)에도 계속 우산 모양의 나무가 보인다. 다만 섬이 원형이 아니라 8각으로 표현되어 있고 나무도 작고 수형정리가 이전보다는 부족해 보인다. 또 그림의 나무는 버드나무가 아니라 소나무에 가깝다.

정리하면 사람이 섬에 들어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버들섬으로 부르고 나무도 잘 다듬어 꾸몄지만 부용정 건축 후 자연스럽게 섬도 활용이 적어지고 버드나무가 죽자 소나무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부용정의 전신인 택수재는 사방 1칸의 정방향 정자로 벽이 없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평난간이 있고 용도는 섬으로 가기 위한 장소로 사용한 것 같다. 즉 택수재 평면은 버들 섬으로 가기 위한 문(門)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규장각 건축 17년 후 부용정을 지으면서 이곳의 공간구조가 다시 한번 변하게 된다. 택수재를 크게 개축하여 부용정을 만든 이유에 대해 선행연구에서는 왕이 혼자 쓰기에는 적당하나 신하들과 함께하기에는 작기에 증축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택수재의 개축 이유는 다른 문제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크기의 문제라면 택수재를 개축할 것이 아니라 섬을 개축하는 것이 합당하다.

정조가 섬을 크게 하지 않고 택수재의 개축을 선택한 이유는 태액지 주 유희공간인 중도(中島)를 크게 할 경우 반대로 태액지가 줄어들어 배를 띄울 수도 없고, 태액이라는 뜻처럼 큰 물이 아니라 개울로 전락해 버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택수재의 자리에 신하들과 같이 할 공간을 만들었다고 본다. 또 하나는 신성한 어제각인 규장각과 유희공간의 거리가 더 멀어지게 되어 규장각이 돋보이게 되고, 섬에 가는 다리를 없애 섬의 조경수에 시선을 모음으로써 상호 간의 간섭이 작아지는 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이로써 정조의 건축인 부용정과 조경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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