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이미산
비를 생각하면
누군가 중얼거린다, 발가락을 만져보렴
비가 오잖아, 내가 중얼거리면
문득 나비 한 마리, 발바닥에 새겨지는 나비의 날개
비는 수없이 다녀가고
저수지 바닥에 엎드린 조약돌, 물결로 흩어지는 구름
그리고 또 기다린다, 비가 와야 할텐데
기다리는 순간 비는 곁에 와 있다
주머니 속에 목마른 하루, 덜그럭거리는 북극성
다시 축축한 손바닥 다시 축축해지는 기억
비를 가두고 비를 기다리다 지친다
미끄러지는 습관, 뜨거워진 맨발, 이마가 빵빵한 배꼽들
텅 빈 신발 속엔 눈동자 머금은 얼룩들
타들어 가는 가슴엔 층층이 누운 비의 그림자들
-시집 ‘저기, 분홍’
비가 스며들어 시인을 점령합니다. 비는 축축하기만 해서 어느 것 하나 습기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감정을 가졌을까요? 타는 목이 되어 덜그럭거리는 별이 되어 기억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들조차도 물컹해지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 시는 비에서 시작된 나이거나 너인 대상과 나누는 밀담입니다. 시인은 온전히 비를 경청하고 말하는 중인데, 마치 비와 샴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은 그림자를 나눠 갖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떠다니는, 흘러다니는 것 모두 우리의 이면 혹은 너이어서 함께 축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독한 비의 날들이 내리는 중입니다. /김유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