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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새롭게 보는 방법을 깨치는 중세인들

 

12세기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곳곳에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웅장한 교회들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건만, 남루한 옷차림을 한 탁발수도사들의 강론을 듣기 위해 거리로 인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전에서는 무지하고 가난한 빈민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설교가 이루어졌고, 교리 역시 이해불가 한 논리들로 전개되었지만 탁발승들의 강론은 지방어로 이루어졌고 다채로웠으며 생생했다. 이들은 강론의 내용을 쉽게 설파하기 위해 무대 위의 배우처럼 행동하기를 전혀 꺼리지 않았고, 때로는 불 위를 걷거나 신비로운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탁발승들의 활약이 활발해지고 도시에서의 영향력 역시 커지면서 이들은 교황권력에 위협적인 존재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교회는 이들을 이단이라 규정하며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박해와 처형을 단행한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출생한 성 프란체스코(1182~1226)는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탁발승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그는 부유한 이탈리아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물질적으로 풍요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20대에 영적 체험을 한 뒤 모든 재산과 상속권을 포기함은 물론이고 두벌 옷과 신발, 심지어 지팡이도 지니지 않는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고 한다. 도시의 빈민들은 프란체스코의 삶에 큰 감명을 얻었고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기존의 수도원들은 속세와 거리를 두려 했었지만 프란체스코는 대중들의 삶에 뛰어들어 그들을 교화하고 구제했다. 수도원들은 도시와 거리를 둔 교외나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프란체스코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도시의 삶으로 직접 뛰어 들어갔다.

도시민들의 눈에 비친 프란체스코는 거리 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며 복음을 설파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현현(顯現)된 대상이었다. 성 프란체스코의 사후 르네상스의 거장 조토(Giotto di Bondone, 1266~1337 추정)가 일부 벽화를 맡았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성 프란체스코를 바라보는 유럽인의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당의 벽화는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대한 연작인데, 이는 예수의 일생을 담았던 다른 성당의 벽화와 매우 흡사했다. 이보다 조금 뒤에 건축되었으며 역시 조토가 벽화를 맡았던 ‘스크로베니 성당’은 ‘성 프란체스코 성당’ 벽화와 거의 비슷한 구조와 내러티브로써 예수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조토가 ‘성 프란체스코’의 일대기를 그린 것은 결코 우연찮은 일만은 아니다.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프란체스코는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는 농업 중심에서 상공업 중심으로 재편된 유럽 사회에서 도시와 대중의 문화를 이끌었다. 또한 상공업의 발전으로 인해 부의 격차가 극심해진 도시에서 빈자와 부자 모두를 감화시킬 수 있는 청빈한 삶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종교와 이상을 그저 알고 있는 수준을 벗어나 몸소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후 때마침 이탈리아는 조토로 말미암아 비잔틴 시대와 중세의 경식된 양식을 벗어나 회화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회화 속 인물들은 실제와 매우 흡사해졌으며, 회화작품은 마치 무대 위의 한 장면과 같은 극적인 생생함과 입체감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중부의 고딕 양식 성당에서도 성경의 한 장면이나 예수의 일대기를 담은 조각품들이 이미 즐비했었고 이들 작품 역시 실제 인물과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었지만, 조각이 아닌 평면의 회화로서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인물의 모습이 재현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였다.

대중들과 가까이 소통하길 원했던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의중에 따라 성당의 벽화는 강론과 더불어 대중들을 교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벽화는 교인들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한 웅장함과 생생함을 공간에 연출했다. 청빈한 삶을 강조했던 프란체스코가 살아서 이 성당을 보았으면 경악할 일이다. 하지만 이단에 대한 박해가 험악했던 시절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존속을 위해 교회를 짓고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길을 선택했으며, 이단이라고 오해를 살 만한 요소를 털어내고 교회의 질서를 준용했다. 그러자 점점 추종자가 늘어나서 당시 최고 위세와 정통성을 인정받았던 베네딕트 수도회와 맞먹는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초창기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박해하던 교회도 결국에는 이 수도회를 공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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