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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백]지고지순한 사랑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영화 한 편을 소개하였다. 그 영화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영화 장면을 보며 오래전에 읽었던 원작 소설의 내용이 떠올랐다.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가 1982년 노벨문학상 ‘백 년 동안의 고독’ 수상 후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로, 19세기 말 콜롬비아 카리브해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세월의 흐름과 죽음, 질병을 뛰어넘는 한 여자와 두 남자 간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가난한 청년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부유한 상인의 딸인 ‘페르미나 다사’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아버지 뜻에 따라 유럽 유학파 의사인 잘 생기고 돈도 많은 ‘후베날 우루비노’와 결혼을 해버린다. 플로렌티노는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며 실연의 상처를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다시 그녀와 조우하면서 확신을 잃는다. 그때부터 그는 언젠가 페르미나가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믿고 그녀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돈과 명예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마침내 페르미나의 남편 우르비노 박사의 장례식 때, 51년 9개월과 4일을 기다려온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작가는 제목처럼 치명적인 사랑을 콜레라에 비유하고 있다. 배경이 19세기 말 남미 지역인데 낙후된 하수 시설로 인해 콜레라가 창궐하는 시대였다. 작품 마지막에서 플로렌티노와 페르미나는 배에서 사랑을 나눈다. 방해받지 않으려고 플로렌티노는 선장을 매수하여 노란 깃발을 꽂게 한다. 노란 깃발은 ‘이 배엔 콜레라 환자가 있으니 접근하지 마시오’라는 뜻이었다. 콜레라를 이용하여 다 늙어서 사랑을 완성한 것이다.

영화와 원작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며 과연 이토록 긴 세월동안 오직 한 여자를, 또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백석과 그의 여인이었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와의 실화가 떠올랐다.

둘이 처음 만나던 날 백석은 김영한을 보자마자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나의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말했다 한다. 이태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인 ‘지아비를 잊지 못하는 아내의 노래’에서 따 온 ‘자야’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영원한 사랑을 결심했다고 한다. 아들이 기생을 만나는 게 싫었던 백석의 부모는 백석을 강제로 결혼시키고 그 때마다 백석은 첫날밤에 자야에게로 도망을 오지만 자야는 피해 버린다. 수소문 끝에 다시 자야를 찾아간 백석은 함께 만주로 도망할 것을 제안하지만 자야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나고 그 이후 6·25전쟁이 발발한다. 잠시라고 생각했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자야는 3년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평생 회고하며 살아간다.

한국 3대 요정의 하나인 ‘대원각’의 주인이 된 그녀는 백석에 대한 회고록도 직접 쓰고, 1997년엔 백석의 이름을 딴 ‘백석문학상’도 제정했다. 이생진 시인이 자야가 죽기 며칠 전 인터뷰했던 기사를 인용한다.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 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요즘은 서로 사랑했다가도 감정적으로 쉽게 헤어지고 조금도 이해심이나 배려가 없는 불신의 세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비록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이지만 플로렌티노의 51년 9개월과 4일을 기다려온 지고지순한 사랑과, 실존 인물인 자야가 평생을 눈 감을 때까지 오직 백석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삭막한 이 시대에 참으로 눈물겨운 순애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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