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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을 장악한 임나일본부설

문재인 대통령 ‘가야사 연구·복원’ 지시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특별전 개최
민족사학계 “임나일본부설 선전장 변질”

가야의 1세기 건국설 방증하는 유물
‘흙방울’ ‘파사석탑’ 전시 놓고 비판
식민사학계 “가야는 3세기경 건국됐다”
조선일보·한겨레신문도 한목소리로 공세
“삼국유사 속 내용 역사적 사실로 둔갑”

“임나일본부설 극복” 말하는 강단사학자들
“임나는 가야” 식민사관 추종 모순 드러내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임나일본부설은 극복되었나 ①

 

가야사 국정과제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은 입만 열면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했다”라고 말한다.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는 국민들은 실제로 남한 강단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를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과연 임나일본부설이 극복되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극복은 커녕 더 확산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자연히 든다. 총론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했다고 말하지만 각론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메이지 때 일본군 참모본부가 만든 학설로서 그 핵심은 고대 야마토왜(大和倭)가 369년 가야를 점령해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562년까지 지배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임나설’ ‘임나가야설’이라고도 한다.

 

남한 강단사학은 총론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은 극복했다”라고 말하고는 곧이어 “임나는 가야다”라고 말한다. 동전의 앞면은 대한민국이라고 써놓고 뒷면은 일본이라고 써놓은 것이다. 남한 강단사학의 이런 모순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에서 전시한 ‘가야본성-칼과 현’이라는 특별전이다.

 

가야본성이라는 특별전

 

국박이 ‘가야본성’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기획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와 복원 지시 때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 1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했고, 100대 국정 과제에 포함되었다. 허성관 전 행자부장관은 6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님의 가야사 복원과 관련하여 걱정되는 점”이라는 글을 올려 “가야사 복원 작업을 교수들에게 맡기면 누가 맡든지 식민사학자일 가능성이 거의 100%입니다. 이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은연중에 확대 재생산할 것입니다”라고 우려했다. 그로부터 2년 반 후인 2019년 12월 3일부터 국박에서 ‘가야본성’을 전시했는데, 허 전 장관의 예견대로 임나일본부설로 뒤덮였다.

 

‘본성(本性:혼쇼)’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국인들은 거의 안 쓰는 일본식 용어로 ‘천성’, ‘정체성’이란 뜻이다. ‘가야본성’은 당초 국박과 부산박물관(4월 1일~5월 31일)을 거쳐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7월 6일~9월 6일)과 큐슈국립박물관(10월 12일~12월 6일)에서도 전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부산전시는 예정보다 늦은 5월 6일 개막해 한 달도 못 채우고 부랴부랴 문을 막을 내렸다. 국박 측은 코로나 19 때문이라지만 그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 선전장으로 변질된 데 대한 물의 때문임을 알고 있다.

 

가야전시를 동시에 비판한 조선과 한겨레

 

‘가야본성’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양쪽의 비판을 받았다. 한쪽은 왜 임나일본부설 선전장으로 변질되었느냐는 민족사학계의 비판이었다. 다른 한쪽은 왜 가야의 1세기 건국설이 사실인 것처럼 여길 수 있는 유물도 전시했느냐는 식민사학계의 비판이었다.


식민사학계의 총대는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이 동시에 맸다. ‘조선일보’는 12월 6일 〈문 코드 맞추려, 검증 안 된 지역 유물도 ‘가야’(허윤희 기자)〉라는 제목의 기사로 강하게 비판했다. 이틀 후인 12월 8일에는 ‘한겨레신문’이 〈검증 안 된 유물까지 ‘묻지마 전시’...관객 우롱한 가야전(노형석 기자)〉라고 가세했다. ‘검증 안 된’이라는 용어까지 똑 같았다. 두 신문 기사는 서로 바꾸어 실어도 좋을 정도로 같은 내용이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이 이구(二口)동성으로 비판한 것은 ‘흙방울’과 ‘파사석탑’을 전시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중간제목으로 “가락국기 내용에 무리하게 짜 맞춘 ‘흙방울’ 유물 자문없이 버젓이 전시, ‘파사석탑’ 허 황비가 싣고 왔다며 설화 속 인물이 역사적 사실로 둔갑”이라고 뽑았다. ‘한겨레신문’의 중간제목은 “역사왜곡 논란 빚은 흙방울부터 설화 배경만 있는 ‘파사석탑’까지 가야시대와 잇닿는 물증 없는데 의미 과장하며 역사적 진실포장”이라고 역시 ‘흙방울’과 ‘파사석탑’ 전시를 비판했다. ‘조선일보’가 “문 코드 맞추려…” 운운하면서 문재인 정권 비판으로 끌고 간 것처럼 ‘한겨레신문’도 “‘가야사 복원’ 국정과제 홍보 치중”이라고 정권의 코드에 맞춘 전시라고 비판했다. 조선, 한겨레의 좌우합작 공세에 밀린 국박은 ‘흙방울’을 치워버리고, 파사석탑에는 ‘신화’라는 딱지를 갖다 붙여 두 신문의 눈치를 봤다. 

 

 

‘흙방울’과 ‘파사석탑’이 왜 문제인가?

 

두 신문은 ‘흙방울’과 ‘파사석탑’을 전시한 것이 나라라도 팔아먹은 것처럼 비난했지만 정작 이 전시의 설명문이 임나일본부설 선전으로 가득 채웠다는, 즉 진짜 나라와 역사를 팔아먹은 벽면에 붙은 설명문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조선일보’는 이 전시에 대해 “학계가 들끓고 있다”라고 비판했고, ‘한겨레신문’은 “문화재학계 반응은 혹평일색이다”라고 가세했다. 여기의 ‘학계’, ‘문화재학계’라는 집단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식민사학계를 뜻하는데, 이들이 ‘흙방울’과 ‘파사석탑’ 전시에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기사가 모두 횡설수설이기 때문에 속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흙방울이란 2019년 3월 대가야가 있었던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제유물인데, 표면에 거북무늬 그림과 하늘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금합자루 같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건국사화 중에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라는 ‘구지가’를 형상화한 것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파사석탑은 서기 48년 아유타국 출신의 허황후가 싣고 왔다는 석탑을 말한다. 이 두 유물을 전시한 것에 대해 왜 조선, 한겨레가 한 목소리로 비판했을까?

 

가야는 3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식민사학계

 

남한 강단사학자들이 쓴 글을 보면 늘 앞뒤가 다르다. 총론과 각론이 다르다. 사전도 마찬가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가야’ 항목을 보자. 가야에 대한 ‘정의’에서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라고 쓰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모두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서기 전 1세기’로서 한 세기 더 끌어올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의’ 다음의 ‘개설’에서는 정의에서 말한 건국시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써놓고 있다. “서기 2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에는 12개의 변한 소국들이 성립되었으며, 그중에 김해의 구야국(狗邪國: 金官加耶)이 문화 중심으로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가야는 3세기경에야 건국되었다고 쓴 것이다. ‘정의’에서는 서기전 1세기경에 건국한 것처럼 써놓고는 ‘개설’에서는 3세기에 건국했다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의 7권이 ‘가야편’인데, 한국 언론에서 ‘미스터가야사’라고 높이는 홍익대 교수 김태식이 썼다. 그는 “여러 가지 한계성이 있기는 해도 3세기 전반에 변진 12국은 김해의 구야국(가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소국연맹 즉 전기 가야연맹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26쪽)”이라고 썼다. 이 역시 ‘3세기 전반에 가야가 건국되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조선, 한겨레가 동시에 흙방울과 파사석탑 전시를 비판한 것이다. 왜 가야가 서기 1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록이 사실임을 방증해주는 흙방울과 파사석탑을 전시했느냐는 공격이다.

 

 

일본인들의 주장 추종

 

남한 강단사학자들과 카르텔 언론들이 가야 건국을 3세기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의 일본인 스승들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가장 방대한 평범사(平凡社) 발행의  ‘일본사대사전(日本史大事典:전7권)’은 가라(加羅:가야)의 건국시기에 대해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엽에 걸쳐 성립했다고 봐도 좋다(2권, 415쪽)”라고 말하고 있다. 남한 강단사학과 조선, 한겨레는 모두 이런 식민사관을 추종해서 가야의 1세기 건국설이 사실이라고 말해주는 ‘흙방울’과 ‘파사석탑’ 전시를 공격한 것이다. 국박이 흙방울토기를 치워버리고 파사석탑에 ‘신화’라는 딱지를 붙이자 이에 고무된 ‘한겨레신문’ 노형석은 12월 18일자 “역사왜곡 논란 국립박물관 ‘가야본성’ 전 대표유물 교체”라는 기사를 통해 “국립박물관 기획전 서두에 나오는 대표 유물이 언론에서 제기한 고증 시비로 바뀌게 된 것은 박물관 역사를 통틀어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자화자찬했다.

 

하마터면 국박에서 가야가 1세기 건국했다는 유물을 전시할뻔했는데 자신과 조선이 합동으로 이 유물들을 거둬치워서 일본인들이 주장한 가야 3세기 건국설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국박의 ‘가야본성’은 그나마 1세기 건국설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은 사라지고 임나일본부설만 가득 차게 된 것이다. 물론 유물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가야 선조들이 남긴 유물은 훌륭한데 지지리도 못난 후손들이 쓴 설명문이 임나일본부설로 가득 찼다는 말이다. 이렇게 일본 극우파는 대한민국의 국립중앙박물관까지 장악했다.


/이덕일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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