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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말하다]주갑제라는 요술방망이와 ‘일본서기‘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

 

‘일본서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주갑제(周甲制)를 이해해야 한다. ‘주갑(周甲)’이란 만 60년을 뜻하는 환갑(還甲)과 같은 뜻이다. 동양 고대 역법(曆法)의 간지(干支)가 한 바퀴 순환하는 것이 주갑이다. 간지(干支)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나뉘는데, 천간은 갑을병정((甲乙丙丁)…등의 열개이고, 지지는 자축인묘(子丑寅卯)…등 열두 개다. 천간에서 갑(甲)을 따고 지지에서 자(子)를 따서 첫해가 갑자년이고, 둘째 해가 을축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지가 한 바퀴를 돌아 만 60년이 되는 것을 주갑(周甲) 또는 환갑(還甲)이라고 한다. ‘일본서기’는 역사서의 기초 중의 기초인 연대부터 맞지 않기 때문에 주갑제를 이용해 2주갑 120년을 끌어올려 연대를 맞춰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가 주갑제다. ‘일본서기’의 연대가 맞지 않는 것은 편찬자의 실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마음먹고 연대를 조작한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 연대는 놀랄만큼 정확하다. 1971년 공주에서 우연히 무령왕릉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는데, 무령왕이 “계묘년 5월 병술 삭(朔) 7일 임진일에 붕어하셨다”말하고 있다. 서기로 환산하면 523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재위 23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어서 사망한 해는 물론 달까지 정확하게 일치했다.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세상이 다시 한번 놀랐다. ‘일본서기’는 초대 신무(神武)의 즉위해를 서기전 66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일본 국민들도 안다. 서기전 660년에 일본에는 나라 자체가 없었다. 일본학자들도 ‘일본서기’의 연대가 거짓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본서기’의 연대를 맞추는 온갖 기묘한 발상이 동원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갑제다. 일본에서는 주갑제 대신 2주갑인상(二周甲引上)이란 표현을 쓰는데 2주갑, 즉 120년을 끌어올려 연대를 다시 계산해야 한다는 논리다.

 

 

초고왕은 가짜고, 근초고왕은 진짜다?

 

주갑제의 가장 중요한 사례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 초고왕의 사망기사다. ‘일본서기’ 신공(神功) 왕후 55년에 “백제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百濟肖古王薨)”고 나온다. 신공 55년은 서기 255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255년은 백제 고이왕 22년이다. ‘삼국사기’는 고이왕은 재위 22년(255) 9월 신라를 공격해서 괴곡(槐谷)에서 이기고 신라 장수 익종(翊宗)을 전사시켰다고 나오지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 등은 없다. 그런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시기’에서 말하는 초고왕(肖古王)은 백제 5대왕이다.

 

그런데 초고왕은 서기 214년 세상을 떠났다. ‘일본서기’가 세상을 떠났다는 4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일본서기’는 백제왕 이름도 틀렸고, 사망 연대도 틀렸다. 그러자 일본인 학자들이 기발한 발상을 했다. ‘일본서기’를 2주갑, 120년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다. 서기 255년에 120을 끌어올리니 서기 375년이 되었다. 그러자 로또에 당첨되는 것 같은 일이 발생했다. ‘삼국사기’는 백제 근초고왕이 재위 30년 겨울 11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해가 바로 서기 375년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375년에 세상을 떠난 임금이 ‘근’초고왕이지 초고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일본인 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초고왕이 ‘삼국사기’의 근초고왕이라고 우겼다.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해(375) 그달에 후사 근수구왕(近仇首王)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는 서기 256년에 “백제 왕자 귀수(貴須)가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고가 근초고왕이고 귀수가 근구수왕이라는 것이 일본 제국주의 사학자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남한 강단사학자들의 교리다. 남한 강단사학계의 태두 이병도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각각 초고왕과 구수왕에 근(近)자를 붙여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5대 초고왕과 6대 구수왕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근거? 그런 것 없다. 하늘같은 스승인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신봉하는 것뿐이다.

 

 

‘삼국사기’ 불신론을 발명하다

 

주갑제가 사실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중요한 것은 ‘일본서기’ 기사가 사실인지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서가 ‘삼국사기’였다는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明治) 이후 군국주의로 달려가기 전까지는 일본학자들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일본서기’의 사실 여부를 판정해왔다. 그런데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오타 아키라(太田亮),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사실과 거꾸로 말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는 가짜고 ‘일본서기’는 진짜다”라는 주장이다. 근거? 그런 것 없다. 자신들이 그렇게 본다는 억지뿐이다.

 

나이토 도라지로(內藤虎次郞:1866~1934)라는 역사학자가 있다. 일본 역사학의 양대 축이 도쿄제대(東京帝大)와 교토제대(京都帝大)인데, 교토제대 중심의 교토학파를 이끈 역사학자다. 일본의 도쿄대는 순혈주의를 고집해 도쿄대 출신이 아니면 교수가 되기 어렵지만 교토대는 실력만 있으면 출신 학교를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대부분 교토대에서 나온다. 나이토 토라지오는 아키다(秋田) 사범학교 출신으로 교토대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일본 고대사 논쟁 중에 도쿄대와 교토대가 맞붙었던 야마대국(邪馬台國) 위치 논쟁에서 교토대학파를 이끌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魏志) 왜인전에 나오는 왜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다스렸다는 야마대국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이다. 제국주의 사관에 충실하던 도쿄대 출신들이 야마대국이 나라(奈良) 근처에 있었다는 기내설(畿內說)을 내세웠고, 나이토 토라지오가 이끄는 교토학파는 지금의 큐슈에 있었다는 큐슈설(九州說)을 주장했다. 이 나이토 토라지오가 조선총독부 이마니시 류의 ‘삼국사기’ 불신론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원래 아방(我邦:일본)의 고대사연구가는 ‘일본서기’의 기년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유력한 방증(傍證)으로서 조선고사(朝鮮古史: ‘삼국사기’등)의 기년을 참고하고 더욱이 그 기사의 내용까지도 조선고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마니시 류 박사가 양국 고사(古史)의 근본적 연구 및 ‘삼국사기’가 이용한 지나사적(支那史籍:중국사료) 등의 연구로부터 종래 연구법을 일변하여 일본고사(‘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사실(史實)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나이토 토라지오의 말은 이런 내용이다. 이마니시 류 이전에는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 연대에 의심을 품고 그 연대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삼아 연구했다는 것이다. 2주갑 인상론 운운하는 이야기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일본서기’ 연대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쓰다 소키치, 오타 아키라, 이마니시 류 등이 ‘삼국사기’는 가짜고 ‘일본서기’는 진짜라고 우기기 시작했는데, 이 억지가 통해 ‘삼국사기’는 가짜로 몰리고 ‘일본서기’가 사실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쓰다 소키치나 이마니시 류가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장한 이유는 임나일본부를 사실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의 이 허무맹랑한 논리가 아직까지도 남한 강단사학계에서는 하나뿐인 정설이다. 평생 이 분야를 연구한 고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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