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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추석과 졸업사진

 

어느 해 추석, 버스가 시골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덜컹하고 열리자 알싸한 황토 냄새와 함께 흙먼지가 훅 차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한껏 멋을 낸 옷에 번들거리는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버스에서 쏟아져 내렸다. 손에는 선물보따리가 가득했다. 터미널에 마중 나온 어린 동생은 제일 먼저 누나가 사온 운동화를 받아 들고 벌써 포장을 뜯고 있었다. 나는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내 손에는 공장에서 준 식용유 선물세트가 하나 들려있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당산나무를 지나 방앗간 터를 지나갈 때 승용차가 빵빵 거리며 나를 비켜 지나갔다. 성공한 아랫집 자식들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승용차를 타고 오지 못했다. 바리바리 선물꾸러미를 가져오지도 못했다. 겨우 결혼은 했으나 결혼식은 하지 못했고 아내가 아파서 아들은 집에 두고 혼자 찾아오는 길이었다. 어머니에게 용돈이라고 드릴 얇은 봉투가 겨우 하나였다. 이미 집에 와 있을 동생들을 볼 면목도 없었다. ‘큰 형이 집안을 위해서 한일이 뭐가 있는가?’ 전번에 집에 왔을 때 어린 동생이 나에게 한 원망이 여전히 귀에서 맴돌았다. 그냥 여기서 발길을 돌려 돌아가고 싶었다.

 

4남 2녀의 장남, 그 중에 유일하게 대학에 간 장남,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장남,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풀어줄 장남 그러나 현실은 비루했다. 대학은 중퇴했고 감옥에 여러 차례 들락거렸고 월세 방에 살았고 맞벌이를 해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산재당해 한 달 이상 쉬어야 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개가 한번 짖더니 이내 나를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일 년 전에 한번 본 나를 알아보다니 기특한 놈이었다.

 

“나 왔소. 엄니!”

“옴메, 우리 큰 아들 왔냐?”

“형 왔는가?”

“큰 형 왔어? 고생했네.”

 

나는 서둘러 방에 들어갔다. 뭐라도 면피를 해야겠기에 봉투를 먼저 꺼내 엄니 손에 서둘러 쥐어주었다. 손주를 데려오지 못한 사연을 얼버무렸다. 잠시 후 어머니가 액자를 가져왔다. 수원에서 공장 다니는 동생이 야간대학에 다녔는데 그 졸업사진이었다. 사각모가 자랑스러웠다. 그때 내 시선에 잡힌 사진이 있었다. 나의 대학 졸업사진이었다. 나는 졸업한 사실이 없는데 내가 대학교 다닐 때 찍은 사진에 합성된 졸업 사진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어색한 사각모를 쓰고 있었다. 시골에 돌아다니며 영정사진을 합성해주는 사진사가 있다더니 그 분의 작품인 것 같았다.

 

추석 보름달이 마당에 가득했다. 마당에서 따놓은 무화과 맛이 눈물처럼 썼다. 그 때 아랫집에서 엄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따 우리 큰 놈이 김대중 선생 대통령 만들라고 징역을 세 번이나 갔다 왔다니까.”

“옴메 장흥 댁도 인자 고생 끝이네. 인자 큰 아들이 뭐라도 한 자리 하겄네.”

“우리 아들들이 얼마나 효자인지 아요?”

 

어머니는 한 동안 나의 과거 행적을 쉬쉬하며 살더니 이제는 저렇게 아들 자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청춘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해 추석에 나는 ‘대학에 다시 복학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중고차라도 승용차를 한 대 사서 타고 다음번 추석에는 내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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