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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여우] [17] 윤심덕 in 나폴리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④ 스포트라이트

  • 안휘
  • 등록 2020.11.06 06:00:00
  • 16면

 

…윤희는 기습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최현규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가 깜짝 놀라 몸을 옴츠렸다. 윤희가 입술을 잠시 떼고 짧게 “진짜로 해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최현규도 끌어안은 손에…

 

 

“아아,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눈을 떠도 어른거리고,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그녀의 모습. 그녀를 만나지 않고는 더 살아갈 수가 없겠구나.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나.”

김우진 역을 맡은 최현규의 매력은 대단했다. 굵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절없이 빠져들게 했다. 그 음성에는 강한 중독성을 부르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배려하고, 때로는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게 허점을 일러주는 자상함도 갖추고 있었다.

연출을 맡은 한상석은 연극 공연 계획을 대폭 축소했다. 공연일도 단 일주일간으로 줄였다. 이민지가 만년의 윤심덕 역을 맡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펼치려던 후반부는 삭제됐다. 윤희와 최현규 두 사람이 끌고 가는 러브스토리 무대로 바뀌었다. 동경에서 레코드 취입을 마친 윤심덕이 김우진을 만나 치밀한 계획을 짜서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것으로 거짓을 꾸며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스토리가 중심이 됐다. 관부연락선 갑판장 역을 맡은 손정우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졌다.

어수선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극단 카프카의 단원들은 점차 밀도를 높여가며 연극 ‘윤심덕 in 나폴리’를 위한 연습에 몰두했다. 김미리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고, 백두 단장 역시 수련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

윤희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단지 연극 주연으로서의 파트너일 뿐인 최현규의 존재가 자꾸만 가슴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큰 키에 곧은 머리칼, 과하지 않은 경상도 억양…무엇보다도 굵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좋았다. 배우에게 있어서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날이 갈수록 최현규의 매력은 빛나 보였고 윤희를 흔들었다. 예쁘고 재능있고 집중력이 좋은 윤희를 그 역시 특별하게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윤희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이민지였다. 두물머리 수련장 생활을 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이민지가 윤희에게 불쑥 물었다.

“윤희야. 최현규 씨 참 좋지?”

윤희는 괜히 뜨끔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뭔가 숨기고 있던 것을 들킨 것처럼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민지의 물음 속에 또 다른 뜻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 연기도 훌륭하시고…좋은 분인 것 같아요.”

이민지의 눈빛이 윤희의 심중을 뚫어보기라도 할 듯 빛났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자 연인이니까, 감정을 한껏 끌어올려 봐. 네가 진짜 윤심덕이 되고, 최현규가 완벽하게 김우진이 될 수 있다면 무대는 최상으로 치솟을 거야.”

“어쨌든 연기인데요, 언니. 대사에 몰입하다가 보면 이게 연기가 아니면 어떻게 하나, 여기에서 못 빠져나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될 때도 있어요.”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배우가 두려워해서는 안 돼. 내 생각에는, 연기를 잘하는 일이 최상의 목표요 가치관이 되는 무대에서 다른 건 아무것도 두려워할 이유란 있지 않아. 최현규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은 네 연기에 보탬이 되는 일이야. …어쨌든 우리 윤희 참 잘 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이민지는 그러면서 윤희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윤희는 이민지로부터 또 다른 용기를 얻은 기분이었다. 최현규가 점점 좋아지고, 목소리를 듣는 게 행복해지는 일을 경계할 이유가 없다는 말로 들렸다.

*

“이 악착같은 사랑의 아귀에서 벗어날 길이란 없는 걸까. 숨 막히는 관습의 감옥을 벗어날 방도란 정녕 없는 건가. 어쩌다가 내가 그만 그이를 보았단 말인가. 그이는 왜 내 앞에 나타났을까. 세상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구나. 아, 아…….”

공연을 열흘 남겨놓고 있을 시점이었다. 오후 시간 연기 연습에 한참 빠져들 적에 백두 단장이 두물머리 수련장에 불쑥 나타났다. 수염을 깎지 않은 것은 물론, 마치 오랫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차림새가 남루했다. 시커먼 땟국물이 흐르는 점퍼에서는 악취가 났다. 술 냄새가 사정없이 풍겼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곤 날카로운 눈빛 하나밖에 없었다. 백 단장의 눈은 여전히 범접하기 힘든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열심히들 했나. 어디 한번 보자.”

백두 단장 앞에서 한상석의 지휘로 단원들의 연기점검이 시작됐다. 백 단장은 중간중간 연기를 끊어가며 지도했다. 그의 연기지도는 뜻밖으로 섬세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몰두하는 열정도 철철 넘쳤다. 윤희는 비로소 그가 왜 그렇게 대단한 연극쟁이로 정평이 나게 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김윤희와 최현규. 다 좋은데, 하나가 부족해. 진짜 같지가 않아. 진짜여야지. 관객들은 금세 다 알아본다고. 곧바로 느끼는 게 관객들의 촉수야. 윤심덕과 김우진이 서로 사랑하는 게 진짜여야 하지 않냐 이 말이지. 무대 위에서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해. 아직은 진짜가 느껴지지 않아. 이 무대가 마지막이라고 믿을 정도로 몰입이 돼야 하는 거야.”

백 단장의 말이 윤희의 가슴에 와서 꽂혔다. 진짜여야 한다?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백두 단장은 해거름에, 한상석에게 뭔가를 지시한 다음 다시 홀연히 수련장을 떠났다. 이민지가 눈물까지 보이면서 그를 배웅했다.

*

“초연이 중요하단다. 기자들이 취재하러 오거든. 연극 담당 기자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게 연극 성패의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야. 잘해라, 윤희야. 자신감 있게. 알았지?”

의상은 물론 분장까지 꼼꼼하게 보아 준 이민지가 무대 뒤에서 윤희를 안아 주었다. 다시 한번 그녀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수호천사처럼 느껴졌다. 윤희는 눈을 잠시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진짜여야 한다… 백두 단장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막이 올랐다. 윤희는 떨지 않았다. 연습한 대로, 꼭 그만큼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세상의 눈을 피해 유부남 김우진과 나무 밑에서 처음 밀회했을 때, 입맞춤하는 장면이었다. 최현규가 키스 흉내를 내기 위해서 끌어안았다. 윤희는 기습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최현규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가 깜짝 놀라 몸을 옴츠렸다. 윤희가 입술을 잠시 떼고 짧게 “진짜로 해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최현규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입을 맞췄다. 객석에서 신음 같은 찬탄이 들려왔다. 윤희의 귀에 진짜여야 한다, 무대에서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던 백두 단장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비로소 자신이 정말 윤심덕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현규 역시 눈빛과 몸짓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진짜가 된 두 사람의 연기는 절절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종반부로 넘어간 연극은 윤심덕이 오사카 닛토(日東) 레코드에서 ‘사의 찬미’를 비롯한 27곡을 녹음한 다음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돼 있는 동생 윤성덕을 요코하마로 떠나보내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갑판장을 거금으로 매수해 시모노세키 항에서 두 사람이 승선한 것으로 위장해놓은 관부연락선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짓는 장면으로 마무리됐다. “이제, 이승에서의 인연은 모두 끊어지는구나.”하고 눈물짓는 윤심덕을 김우진이 포근히 안아 주면서 페이드아웃과 함께 막이 내려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커튼콜이 끝나자 객석에서 누군가 윤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카메라를 멘 여기자, 김도숙이었다. 다른 기자들도 앞으로 나와 윤희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대성공이네요. 최현규 배우는 그렇다 치고, 우리 김윤희 배우님 연기 정말 대단해요.”

윤희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느새 이민지가 다가와 등 뒤에서 윤희를 안았다. 동숭동… 대학로의 정겨운 기운이 처음으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행복했다.

 

=> 폭포처럼 쏟아진 위험한 사랑. 윤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다음 주 ‘[18] 거꾸로 흐르는 강-① 꿈의 이면’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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