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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사상의 은사 리영희

 

나는 1964년 전남 장흥에서 별 볼일 없는 둘째 아들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가난한 집안의 장남은 육사와 법대를 인생의 목표로 길러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부를 잘한 것이 더욱 나를 보수적이고 출세지향주의적인 밥맛없는 인간으로 키워놓았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던 날 나는 "민족의 태양이 졌다!" 고 일기에 썼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군이 목포에 왔을 때 나는 고등학교 동기들을 막아서며 "이러면 안 된다. 이건 간첩의 선동에 휘둘리는 것이다." 고 말렸다. 고백컨대 그런 인간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상과 이성>은 내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나는 억울하고 분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온통 우상 덩어리였다. 그제야 김지하의 오적이 보였고 전태일이 보였다. 내가 난장이였던 것이 보였다. 그제야 베트남이 중국이 미국이 북한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날짜가 기억이 없지만 84년 선생님이 학교로 돌아오셨다. 지금은 없어진 운동장에서 제자들과 체육대회를 했다. 나는 먼발치에서 선생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선생님 수업을 듣고 싶어서 3, 4학년 전공수업인 신문평론(신문영어?)을 도강했다. 맨 뒷자리에서 혹시나 들킬까싶어 선생님을 힐끗거렸다. 그것이 선생님과 내 인연의 끝이다.

 

리영희 선생님 10주기가 벌써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리영희 선생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 있을까? 한쪽에서는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비난하고 한쪽에서는 ‘사상의 은사’라고 존경한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나에게 리영희 선생님은 사상의 은사이다.

 

“혁명가는 지나온 혁명이 그 인간의 전기다. 마찬가지로 사상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글은 자신을 말하는 전부다”

 

1963년 12월 18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특사로 방한한 일본의 오노가 기자회견에서 말한다. “나와 박정희 대통령의 관계는 부자지간이나 다름없다.”라고 오노가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기자들이 침묵하고 아무도 감히 질문하지 못할 때 “당신과 박정희 대통령이 부자지간이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오.”라고 질책하듯 질문을 한 기자는 누구인가? 그 분이 당시 합동통신 정치부 기자였던 리영희다. 요즘 기자들 중 이런 기개를 갖춘 기자가 몇 명이나 있는가? 1974년 출간한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다시 이상주의자가 되자.’라는 글에 ‘기자란 무엇인가?’ 에 대한 리영희 선생의 생각을 정리하셨다.

 

1. 아이디얼리스트(이상주의자)가 되자.

2. 관료가 아닌 지식인이 되자.

3. 지식인적 자각에 입각한 실천적 행동을 하는 사람(志士)이 되자.

4. 기자는 범세계적, 범인류적이면서 동시에 민족적이어야 한다.

 

리영희 선생이 이미 50여 년 전에 쓴 이 글보다 현재의 기자들에게 적합한 글이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어떤 누구의 글도 ‘기자란 무엇인가?’ 에 대한 명쾌한 답을 리영희 선생만큼 제시하는 이는 없다. 기자들이여,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다시 이상주의자가 되자.’라는 리영희 선생의 글 하나만이라도 읽어보시라. 그리고 그 글에 대한 반론을 단 하나만이라도 나에게 이야기해보라. 그럼 당신을 기자라고 인정하겠다.

 

- 리영희 선생 10주기를 앞두고 대한민국 기자들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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