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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의 인천얘기 10 - 세브란스병원

 

 조선시대 많은 유민(流民)과 사망자를 발생시켰던 재해(災害)는 가뭄과 역병(전염병)이었다. 전쟁은 이보다 훨씬 심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고 혹독한 세금과 홍수, 냉해 등 다른 자연재해도 정도는 그보다 덜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이에 대한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왕권강화를 위해 수 많은 측근 공신과 외척들을 숙청했던 ‘철혈군주’ 태종도 재위 18년 간 매년 계속되는 가뭄에 애를 태웠고, 순조 21년(1821)에는 괴질로 3일 사이에 평양에서 무려 1000여 명이 죽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현종 때 ‘경신 대기근’은 우리역사 상 전대미문의 재앙이다. 1670(경술)~71년(신해) 2년 간 전국 8도에 가뭄, 홍수, 냉해, 병충해 등 재해란 재해가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화불단행(禍不單行), 뒤를 이어 전염병과 우역(牛疫, 소 전염병)이 만연했다.

 

이로 인해 당시 인구의 최소 10% 또는 그 이상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임진왜란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참혹했다.

 

특히 소리없이 찾아오는 역병은 엄청난 공포 그 자체였다.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마마), 이질, 홍역 등 병의 위세는 지금과 똑같은데 그 때의 열악했던 의료기술이나 시설, 의료진, 예방수칙, 위생관념 등을 고려할 때 전염병 앞에 느껴야 했던 사람들의 참담하고 절망스러운 심정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역병이 한 번 돌면(간혹 중국을 통해 들어오기도 했다) 그 마을은 크든 작든 거의 초토화됐다. 무수한 사람이 죽어나가야 끝나는 것이 역병이었다.

 

물론 국가도 치료와 구제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의원과 약재를 급히 보내고 격리 등의 조치도 취했다. 하지만 빈약한 인프라로 대처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그렇다보니 민간은 물론이고 사대부가와 왕실에서도 굿, 푸닥거리, 부적 등 미신이나 주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적으로는 배척당했던 절(불교)도 중요한 의지처였다.

 

‘화약을 대궐 뜰에 설치해 역질을 쫓는 연례적 행사를 하다’(태종 13년 12월29일) ‘전염병의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군기감에 화통을 쏘게 명하다’(태종 16년 5월8일). 지금 잣대로는 황당하지만 엄연히 실록에 나오는 기사다.

 

내의원(왕실치료), 전의감(고위관료 치료, 의료행정·교육), 전향사(의약품 보관), 혜민서(서민 치료), 활인서(서민 치료·격리·보호), 제생원(서민 구호) 등이 조선시대에 있었던 의료기관이었다. 여기에 소속된 의원과 의녀들도 있었다.

 

그러나 진맥을 통한 약물이나 침, 뜸 등 제대로 된 치료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부 양반들도 이러한 혜택을 받기가 쉽지 않았는데 하물며 양민과 천인들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진맥 한 번만.. 침 한 번만.. 약이나 한 첩..”을 외치다 죽기 일쑤였다.

 

때문에 민간에서도 병의 증상과 치료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웬만한 양반들은 의학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췄고, 자신의 거주지에서 의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조실록 24년(1800) 6월 기사에는 서거 전 정조가 여러 차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면서 약재를 처방하는 장면이 일지처럼 상세히 기록돼 전한다. 전문의를 방불케 할 정도다.

 

이처럼 전근대적 방법으로 전염병과 힘겹게 싸워온 우리가 근대 의료기술을 접하게 된 것은 개항 뒤다. 1885년 4월 광혜원(廣惠院)이 설립됐다. 보름 뒤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뀐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근대적 의미의 의료혜택이 시작된 것이다.

 

한해 앞선 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에서 개화파에 의해 심각한 자상(刺傷)을 당한 민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외과수술과 치료를 통해 살려내면서 국왕 부부의 신임을 얻은 선교사 알렌에 의해 탄생했다. 치료과정에 감동한 고종이 설립을 허락하고 이름까지 하사한 게 바로 제중원인 것이다.

 

많은 우여곡절과 진통 끝에 1904년 미국인 부호 세브란스씨의 거액 기부금으로 지금의 서울역 앞에 새 건물이 지어지면서 ‘세브란스병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의과대학, 연세대학교의과대학으로 변화를 거듭했지만 병원이름은 줄곧 세브란스였다.

 

말도, 탈도 많았던 인천송도 세브란스병원 건립이 본격화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월 말이나 3월 중순쯤 기공식이 열릴 예정이라 한다.

 

세브란스병원은 ‘하는 거냐, 안 하는 거냐, 도대체 할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이냐’ 등을 놓고 지난 14년 간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인천의 현안이었다. 오죽했으면 올 연초에 낸 인천시장과 인천시의회 의장의 신년사에도 2020년 거둔 대표적인 성과의 하나로 ‘세브란스병원 건립문제 해결’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을까 싶다.

 

지난해 시와 시의회가 연세대 관계자들을 의회와 지타워 등지에서 여려 차례 만나 매조지한 결과다. 이번에야 말로 서로간 신뢰를 토대로 사업을 차질없이 진행해 ‘2026년 개원’이라는 시민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인천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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