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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순이의 달

 

순이는 우리나라 남쪽 해안가 끝 마을 어디쯤에서 20세기 끝 무렵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가리봉동 염색공장에 다녔다. 순이는 하루 16시간을 일했다. 염색약 냄새가 코를 헐게 했다. 걸핏하면 코피가 터졌고 졸음을 쫓기 위해 타이밍 약을 먹었다. 그래도 순이는 행복했다. 월급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급의 반은 고향에 부치고, 방세내고 나면 남는 돈은 쥐꼬리만 했다. 그 돈으로 영화도 한번보고 푼돈이라도 야금야금 모으기 시작했다.

 

설날이 다가왔다. 순이는 가리봉시장에 가서 엄마의 외투를 사고, 남동생이 좋아할 운동화와 운동복도 사고, 어린 여동생을 위해 카세트도 샀다. 아버지에게 드릴 용돈은 천 원짜리 새 돈으로 바꿔 놓았다. 설날 하루 전 순이는 공장 정문 앞에서 봉고차를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귀향 차표를 구할 수 없어 봉고차를 타고 가기로 한 것이었다. 고향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너무나 막혔다. 순이는 화장실이 급해졌다. 어느 덧 봉고차가 천안을 지나고 있었다. 휴게소에 차가 멈췄고 순이는 급히 차에서 내렸다. 다른 사람들도 어지간히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이다. 모두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돌아와 보니 봉고차가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을 전부 뒤졌지만 봉고차는 없었다. 순이는 비로소 봉고차가 자신들을 버리고 가버린 것을 알았다. 선물꾸러미 뿐만 아니라 가방 속 지갑까지 몽땅 사라진 것이었다. 고향 길은 앞으로도 오백리길인데 집에 갈 방법이 없어졌다. 순이는 휴게소 찬 바닥에 쓰러져 울었다. 그 날 순이의 달은 어디에도 뜨지 않았다.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살이 할 때 그 봉고차를 몰았던 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설날이라고 징역에도 특식으로 떡국이 나왔다. 어쩌다 설날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나쁜 놈(절도범)이 자랑이라도 하듯이 십여 년 전 자신의 절도 행각을 주절거린 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그 놈을 용서 할 수 없었다. 얼굴을 짓뭉개고 싶었다. 둘은 그렇게 뒤엉켜 싸웠다. 그러나 공안사범의 주먹질은 어설펐다. 막상 얻어터진 쪽은 나였다. 둘 다 징벌방으로 끌려갔다.

 

그 날도 징벌방에 순이의 달은 뜨지 않았다. 설날 밤에 나는 징벌방에서 구슬프게 울었다. 그날 집에 갈 길이 없어서 추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하염없이 고향 하늘만 쳐다봤을 순이와 마을 어귀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순이를 기다렸을 엄마와 담배만 뻐끔거리면서 오지 않는 순이를 기다렸을 아버지와 나이키 운동화를 기다렸을 동생이 너무나 서글펐다.

 

나는 지금까지 그놈을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으로 알아왔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 생각이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김수영이 시에서 노래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어쩌면 나는 진짜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들을 애써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이번 설날에도 해고노동자 김진숙의 달은 뜨지 않는다. 김용균 어머니의 달은 뜨지 않는다. 시인 송경동의 달도 뜨지 않는다. 세월호 어머니들의 달도 뜨지 않는다. 그렇게 죽어간 택배노동자들의 달도 뜨지 않는다. 순이의 달은 여전히 뜨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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