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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양주군 ‘구지면’에서 ‘구리시’가 되기까지…

① 이름의 유래와 변천

 

경기도 중부에 위치해 있는 구리시는 삼국 시대에는 백제·고구려·신라에 속했고, 고려 시대에는 양주·남경·한양부에 속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양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때 ‘구지’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14년 구리면이 되었다. 그리고 1963년 서울특별시가 확장되면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은 인창리 등 7개 리로 편재되었다가 1973년 양주군 구리읍이 되었으며, 1986년 남양주군과 분리되어 구리시로 승격했다.

 

구지(九旨, 龜旨)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온다. 당시 양주에는 구지면을 포함하여 32면·리가 있었으며, 사노리·인장리·수택리·백교리·토막리·동창리·이문리·평촌리·아차동·우미천리 등 10리가 구지면에 속하였다.

 

 

구지면(龜旨面)에는 동구릉(東九陵)의 조선 왕릉 9릉 17위가 모셔지면서 능침의 보수와 유지를 위한 면세전인 묘위전(墓位田)이 많이 설치됐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 구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양주군의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통합되고 여기에 양주군의 진관면·별비면·미음면·노원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어 구지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이 되었다. 이때 편입된 동리(洞里)도 통합되어 묵동리·중하리·상봉리·신내리·망우리·인창리·사노리·교문리·수택리·토평리·아천리·갈매리 등 12개 리로 재편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지만, 일제의 한반도 철수와 함께 일시적인 행정과 치안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를 메우기 위해 전국적으로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자 구리 지역이 속하였던 양주에서도 양주군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어 이성호(李星昊)·이경규(李景圭)·이덕창(李德昌) 등이 활동했다.

 

6·25 전쟁 발발 3일 만에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구리 지역도 북한군의 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변했고, 국군은 구리 지역 탈환을 위해 9월 26일 밤과 다음날 새벽까지 인민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편, 1951년 1월 후퇴하던 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 변의 토평리와 동구릉까지 지뢰를 설치하였는데, 훗날 제거되지 않은 지뢰로 인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1963년 1월에는 서울특별시 동대문 구역 확장에 따라 묵동리·중하리·상봉리·신내리·망우리 등 5개 리가 분리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양주군 구리면은 인창리·사노리·교문리·수택리·토평리·아천리·갈매리 등 7개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1973년 7월 1일 양주군 구리면에서 구리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 4월 1일 양주군이 남양주군과 동두천시로 분리 개편될 때 구리읍은 남양주군에 속하게 됐다. 이어 1986년 남양주군에서 분리될 때 구리시(九里市)로 승격되었으며, 7개의 법정동(6개의 행정동)으로 편제되었다. 1995년 3월 13일 행정동 교문동이 구리시 교문1동과 교문2동으로 분리되어 7개 행정동이 되었으며, 1996년 1월 8일 수택동이 수택1동으로 개칭되고, 수평동이 수택2동과 수택3동으로 분동되면서 8개 행정동이 되었다.

 

[ 경기신문 = 장학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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