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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삼척이 경상북도에 있다는 한국사교과서들

고려강역 이야기②

 

 

고려는 한반도도 차지하지 못한 나라였나?

 

지금 사용하는 검정 한국사교과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사용했던 모든 국정과 검인정 교과서는 고려강역을 한반도의 2/3 정도 크기로 그려놓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저절로 “고려는 작고 초라한 나라였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고려는 북방 강역을 두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서북방을 북계, 동북방을 동계라고 불렀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 당시의 국정교과서는 물론 현재 문재인 정권의 검정 한국사 교과서의 고려 강역 지도는 모두 동계를 함경도와 강원도, 경상북도에 길게 걸쳐 있는 것으로 그렸다. 동계의 남쪽 끝을 지금의 경북 영덕과 포항 사이로 그려놓고 있다. 고려의 동계 지도를 보면 고려 사람들은 왜 이런 행정구역을 만들어놨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행정구역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의 동계는 중국 고대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수도 자리에 세웠다는 낙랑군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다. 낙랑군의 상급 행정기관인 유주(幽州)는 지금의 북경이라는 것이다. 낙랑군의 군청소재지는 지금의 평양인데, 도청 소재지는 지금의 북경이라는 것이다. 공문서 하나 전달하려다가 해가 넘어갈 판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큰 행정구역이다. 고려 동계 지도나 낙랑군과 유주 지도 같은 허황된 논리가 통하는 곳이 한국 강단사학계다. 고려의 동계와 낙랑군의 위치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역사관이라는 점이다.

 

고려의 동계가 어디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준이 되는 사료는 고려에 대해서 서술한 《고려사》의 기록일 것이다. 동양 유학사회는 뒤에 들어선 왕조가 앞에 있었던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렇게 서술된 역사서를 정사(正史)라고 부른다. 그래서 고려가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처럼 조선은 고려의 정사인 《고려사》를 편찬했다. 《고려사》에는 고려 각지의 지리에 대해서 서술한 〈지리지〉가 있는데 고려 동계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이북을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고려사》 〈지리지〉 ‘동계’)”.

고려의 동계는 북쪽이 공험이고 남쪽이 삼척이라는 것이다.

 

 

◇삼척이 경상북도에 있었다고?

 

 

익숙한 지명이 아닌 공험은 일단 놔두고 동계의 남쪽이라는 삼척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삼척이 경상북도가 아닌 강원도에 있다는 것은 초등학생이 아니라 유치원생도 안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학계를 대표한다는 학자들이 만든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삼척을 경상북도 영덕과 포항 사이에 있다고 그려놓았다. 삼척은 동경 129°21'∼128°57', 북위 37°02'∼37°28'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 영덕은 동경 129°09′∼129°27′, 북위 36°15′∼36°40′에 위치하며, 포항은 동경 128°59′∼129°35′, 북위 35°50′∼36°20′에 위치한다. 이처럼 경도와 위도가 모두 삼척과 다른 지역을 삼척이라고 버젓이 그려놓고 학생들에게 외우라고 하는 것이다. 남한 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의 《한국사대관》이 그렇게 그려놨고, 한때 공무원 시험의 필독서였던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이 그렇게 그려 놨다. 이병도는 《고려시대연구》를 출간했고, 이기백은 《고려 병제사(兵制史)연구(1968)》, 《고려귀족사회의 형성(1990)》 등을 출간한 역사학자인데, 삼척이 강원도에 있는지 경상도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2006년 제49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는 ‘우리 시대의 역사가를 말한다’라는 주제의 컨퍼런스가 열렸다. 여기에서 서양사학자 김기봉은 ‘모든 시대는 진리에 직결돼 있다-한국 역사학의 랑케, 이기백’을 발표했다. 이기백을 랑케의 실증주의와 비교하는 것은 랑케가 노르망디가 프랑스에 있는지 독일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남한 역사학계는 서로 자화자찬하면서 강원도 삼척을 경상북도에 있다고 그려놓은 이기백을 한국의 랑케라고 추앙한다. 그러니 “삼척이 강원도인지 경상도인지 실증적으로 검토해보자”라고 제의하면 토론에 응하기는커녕 ‘사이비역사학’이니 ‘유사역사학’이니 하는 비난을 앞세우고 절대 토론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

 

강원도 삼척을 경상도에 그려놓은 현재 한국사교과서들이 동계의 북쪽 끝이라는 공험진은 어디라고 그려놨는지 살펴보자. 지도상으로 보면 함경남도 함흥 부근이라고 그려놓았다. 먼저 공험진의 위치를 알기 위해 《세종실록》 〈지리지〉의 함길도(咸吉道)편을 살펴보자.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이다. 고려 성종 14년(995) 을미에 나라 안을 나누어 10도(道)로 삼고 동계(東界)를 삭방도(朔方道)로 삼았는데, 함주(咸州) 이북이 동여진(東女眞)에게 함몰되자 예종(睿宗) 2년 정해(1107)에 중서시랑평장사 윤관을 원수로 삼고, 지추밀원사 오연총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에서 공험진까지 아홉 성을 쌓아 경계를 정하고, 비석(碑石)을 공험진 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고려는 개국 직후인 성종 14년(995)에 나라 안을 10도로 나누면서 동북쪽 동계를 삭방도로 삼았는데, 함주 이북을 동여진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 예종은 윤관을 원수로 삼고 오연총을 부사로 삼아서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동여진을 치라고 명했는데, 윤관은 동여진을 쳐서 9성을 쌓고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의 강역’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예종이 사신을 요(遼)나라에 보내 이 사실을 알리자 요나라 천조제가 “싸움에 이겨서 항복을 받고, 드디어 강토를 넓혀서 보루를 두어 시설을 설치했으니 서로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축하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요나라로부터 이 강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조는 두만강 변에 있던 경원에서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700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까지 700여 리”라고 말하고 있다. 두만강 가의 경원도호부에서 공험진까지 북쪽으로 700리라는 것이고, 윤관이 「고려지경(高麗之境:고려의 강역)」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공험진 선춘령까지는 동북쪽으로 700여 리라는 것이다.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이 공험진이라는 것인데 현재 중·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검정 한국사교과서는 두만강 남쪽 1000리 지역의 함흥을 공험진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북쪽과 남쪽의 의미도 모르는 학자들이 쓴 교과서다.

 

 

◇일제강점기 지식인이 바라본 고려 강역

 

천도교계에서 발행하던 《개벽》 1921년 11월호는 간도 영신학교 학감 윤화수(尹和洙)의 〈간도와 조선인의 교육〉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싣고 있다. 윤화수는 자신이 말하는 간도가 서간도, 북간도를 총괄하는 간도가 아니라 지금의 연길(延吉), 왕청(汪淸), 화룡(和龍), 훈춘(琿春) 등의 지역을 뜻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땅의 역사로 말하면 매우 복잡하다 하겠으나 이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단군 성조(聖朝:성스러운 조정)의 옛 강역으로서 고구려의 활동무대의 일부가 되었고, 발해국의 남경(南京)으로서 여진족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고려 예종 때에 송화강(松花江) 연안되는 선춘령에 정계비를 세우고, 여진을 이북으로 구축시켜 완전히 고려 판도에 들어왔으며……”

 

현재 만주를 흐르는 송화강 연안에 윤관이 세운 비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중고교 학생들이 배우는 《한국사교과서》는 두만강 북쪽 700리 지역에 있었던 고려강역을 두만강 남쪽 1천여리 지역의 함흥이라고 배우고 있으니 이 나라에 교육이라는 것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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