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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9. 성남 분당 수내동 한산 이씨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은 자연과 역사와 도시환경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문화유적을 도심지 안에서 잘 보존해 조화를 이룬 모범적인 신도시 건설의 사례를 보여 주고 있다. 한산 이씨 살림집과 묘역이 잘 보존되었고, 분당지역에서 조사된 고인돌이 복원돼 있다. 수내동은 충효와 의리와 관련된 사연이 많은 마을이다.


수내동은 한산 이씨들이 70가구가량의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마을이다.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한 해의 운세를 알아보는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이 할아버지 봉화현감 이장윤의 묘를 이곳에 쓴 이후로 후손들이 번창했다.

 

 

 

수내동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많다.

 

이장윤의 증손자 아천부원군 이증(李增)은 1589년 정여립의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임금이 수내동 지역의 넓은 토지를 내려줬다. 이증은 사람 됨됨이가 정직하고 아첨하기를 싫어해 한때 좌천되기도 했고, 높은 벼슬을 할 때도 가난한 선비처럼 생활하면서 효도와 우애도 지극했다.

 

아천부원군의 아들 이경류(李慶流)는 임진왜란 때 상주전투에서 윤섬, 박지와 함께 순국해 삼종사관으로 일컬어진다. 이경류는 형을 대신해 상주전투에 장군의 참모로 참전했고, 장군은 이미 퇴각했지만 끝까지 전투현장에 남아 맨주먹으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경류가 타고 간 말이 피묻은 옷을 물고 500리길을 달려 수내동까지 와서는 굶어죽었다 한다.

 

그가 전사하던 날 낮에 부인에게 나타나 "내가 조금 전 죽었는데 시신을 찾기 어려울 것이고, 좋은 땅에 있으니 찾지 말고 그냥 둬도 좋을 것이오. 그저 옷과 신으로만 장례를 치러도 될 것이오"라고 했는데 며칠 후 전사 소식이 왔고, 왜군이 이경류 묘 앞을 지나는데 말발굽이 떨어지지 않음으로 말을 죽여서 패했다든지, 죽은 후에도 형에게 나타나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했다든지, 심지어는 제사를 지낼 때 술잔을 올리면 잔이 비워졌다고 하는 흥미로운 전설이 많이 전해온다.

 

이경류의 손자인 청백리 이병태는 굶어죽었다고 소문날 정도였다. 생전에는 임금에게 직언을 하여 영조임금이 호랑이 가죽을 내려주기도 하였고, 외교문서를 담당하였을 때는 할아버지가 왜군들에게 죽었기 때문에 일본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존칭을 쓸 수 없다하여 사직하였다. 세상을 떴을 때는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없어 임금이 부의를 내려주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 계모를 보호하려다 피살된 효자 홍수원의 묘도 있다. 홍수원의 아버지가 병자호란 충신 삼학사 홍익한이다. 홍수원의 묘가 수내동 한산 이씨 묘역에 있게 된 것은 부인이 한산 이씨이기 때문이다. 삼학사 중 윤집은 이경류와 함께 전사한 윤섬의 손자이다.

 

수내동(藪內洞)은 이병태가 벼슬에서 물러나 이 일대에 숲을 가꾸어서 불려지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숲안’이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돌마면 수내리 또는 낙계리(落溪里)로 불렸다. 탄천이 홍수 때마다 물길이 변하여 늪지가 많았고 가시덤불이 많아서 가시덤불, 또는 늪이라는 뜻의 수(藪)자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또는 분당천이 탄천으로 이어지는 지점이라서 숯내의 발음이 수내로 됐다고 볼 수도 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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