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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10. 황무지에 피워낸 희망의 꽃 모란(牡丹)

 

모란은 ‘꽃의 왕’이라 불리고 부귀와 명예를 나타내며, 복스럽고 덕이 있는 여인으로 비유된다.
모란이 성남의 지명으로 된 데에는 사연이 깊다. 1960년대 초에 예비역 대령 김창숙이 이 지역 황무지 땅을 개척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김창숙은 6.25가 끝나고 대구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작은 살림집을 짓고 ‘모란사(牡丹舍)’라 불렀다. 전역 후에는 ‘국군도수체조’를 인쇄하여 납품했는데 출판사 이름이 모란출판사였다. 이어서 1961년 성남으로 와서 황무지를 일궈 농장을 만드는 단체를 만든 것이 모란개척단이었다.

 

 

이렇게 모란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데에는 김창숙 대령의 어머니 고향이 평양 모란봉이기 때문이다. 모란은 한 청년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함축된 상징단어였고, 고향을 공산주의자로부터 되찾고자 군인의 길을 간 청년장교의 반드시 탈환해야 할 목표였다.


김창숙은 5.16 직후 경기도 광주군수가 되었으나 약 3개월 만에 사직하고 거친 자갈밭으로 와서 청년 50여 명을 모아 개척사업을 시작했다. 정부의 지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김창숙 대령이 미군부대의 중장비를 빌려와서 단대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을 쌓기 시작했다. 단대천은 장마철 마다 익사사고가 발생했는데 90년대 초에 복개되고 지하철 8호선이 통과한다. 모란개척단의 활동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고 하는 청도 주민들의 1971년 수해복구 사업보다 10년이 앞선 것이었다.


모란 개척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모란시장이 생겼다. 천호동에서 오포까지 운행되는 버스 정류장이 생기고 모란우체국이 설립되었다. 모란우체국은 장승길이 설립한 별정우체국이었다. 장승길의 형이 체신부(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장승태이다. 1972년에 성남우체국이 생기기 전까지 지역 주민들에게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전하던 유일한 통신시설이었다. 모란개척단은 스스로 흙벽돌을 찍어 교실을 짓고 모란중학원을 설립했는데 지금의 풍생 중고등학교이다.

 

 

모란개척단에서는 새로운 농사도 시도하였다. 동아일보 1962년 2월 9일 기사에는 자갈밭 25만평을 개발하고 있는 ‘모란지구 농장개척단’에 하와이 교포들이 보낸 의류 2트럭이 선물로 와서 모란학원 학생 200여 명과 주민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미8군의 도움으로 1961년에 커피를 시험 재배하여 반가마의 커피씨를 수확해 앞으로 국산커피 ‘건설차’를 대대적으로 재배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커피나무가 한국 기후에 적응하기 어려운데 어쨌거나 개척단 청년들이 잘 살아보려고 애쓰고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커피 재배의 실상은 결명자 재배였다. 비슷한 시기에 하남 미사리에서 김용기 장로가 가나안 농군학교를 만들고 주민들에게 결명자 재배를 권장하였고 결명자차 이름을 ‘건국차’로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의장이 가나안 농군학교를 둘러보고 건국차를 마셨다

 

 

모란은 자갈밭 황무지를 청년들이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잘살아보기 위해 맨손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시장을 만들어 모란과 모란시장이라는 특수한 땅이름 고유명사를 남겼다. 모란 주변에는 수많은 점포들이 모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며, 전국 8도의 지명이 서로 어울리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팔고 있다. 그런데 모란 지명은 행정지명이 아니다. 사람으로 치면 주민등록이 안 된 셈이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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