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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13. 육지의 섬, 섬마을 도촌동

 

섬말로 불리는 도촌동(島村洞)은 옛날에는 갈현동에서 구운 옹기를 파는 가게가 있어서 옹점촌(饔店村)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도촌동은 고성이씨 선조인 이원(李原, 1368~1430)이라는 분의 묘가 있었다. 그는 권근(權近)의 처남인데, 이방원을 도와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좌의정에 까지 올랐으나 말년에는 공신 문서를 박탈당하고 여산으로 귀양을 가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고, 세조 때에 관작이 회복됐다.
 
고성이씨는 이원의 후손인 이괄(李适)이 인조가 집권할 때 군사를 동원해 큰 공을 세움으로써 크게 번창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반정(反正)에 늦게 참여했다는 이유로 1등 공신이 못되고 2등 공신이 되었을 뿐 아니라 평안병사로 밀려났다. 사실 인조반정은 군사 쿠데타였고, 기밀이 누설되자 김자점 등은 약속된 시간에 거사 장소에 나타나지도 않아서 이괄이 군사를 진두지휘하여 성공한 것이었다. 인조 집권 후 이괄의 아들이 공신들의 횡포에 비판적 입장을 가짐으로써 반역의 무고를 당하게 되어 장인 이방좌, 부인 광주이씨 이례(李禮), 아우 이돈(李遯)이 능지처참을 당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함으로써 역적이 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용머리라는 곳에 자리 잡은 이괄의 5대조인 이원의 묘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고 하여 의금부에서 나와 이원의 묘를 파헤치니 묘에 연결된 연못에서 물이 계속 나와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를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지나가던 한 스님이 양평 어느 곳에 가면 물길이 이곳으로 연결된 곳이 있으니 그곳을 막고 퍼야 물이 마른다고 해서 알려준 곳으로 가보니 큰 물구멍이 있어서 그곳을 막고 와서 물을 퍼내었더니 물이 그치기 시작했다.
 
물을 다 퍼내고 묘와 연못이 마른 후에 살펴보니 이원의 시신은 없고 용의 모습이 완벽한 이무기가 발톱과 몸에 비단 자락과 비단실이 엉켜서 날아오르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치고 있어 죽였더니, 이무기의 비늘이 수년간을 흘러내렸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런 전설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듯 도촌 신도시 건설 때 용의 머리와 여의주를 쥔 발톱이 출토 되었다.

 

 
이괄의 조상 묘역을 부관참시하고 마을 주변에 감시하는 사람을 두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서 섬처럼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하여 섬마을로 불렸다는 설화가 있는 마을이다. 또 다른 전설은 마을 양쪽으로 냇물이 있어서 풍수지리로 볼 때 섬처럼 생겼다고 해서 섬마을이라고 불렸다고도 하고, ‘을축년(1925) 대홍수’ 때 마을이 섬처럼 고립되어서 섬마을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촌동 매화마을 아파트 4단지 뒤편 고성이씨 용간공파 종중산 끝자락에는 450여년 된 땅속 깊이 뿌리 내린 큰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가 있다. 이 느티나무는 죽은 가지라도 가져가면 집안에 우환이 든다는 전설이 있어서 해마다 고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었다. 마을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큰 그늘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견디고 기다린 느티나무! 기다린다는 건 시간과 마음을 주는 일이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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