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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14. 성남 오야동 이야기


성남시 오야동은 수정구 신촌동이 관할하는 법정동으로 와실(瓦室)·왜실·오야소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기와를 구웠으므로 와실 또는 왜실이라 부르던 것이 오야리로 변했다는 설이 있고,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오야소(梧野所)라 하고, 오동나무 열매가 잘 열렸으므로 오야실(梧野實)이라 칭하던 것이 오야리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오야동은 마을의 면적은 작지만 옛 마을의 정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고, 다양한 지명과 역사적 사연이 많다. ‘죽바위’라는 100m 정도의 큰 바위가 있는데, 나무가 우거져 바위가 가려지면 풍년이 들고, 숲이 없어서 바위 모습이 드러나면 흉년이 들어 죽을 먹게 된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리고 옛날에 장사가 바위를 들다가 힘이 부쳐서 다시 내려놓고 화가 나서 주먹으로 내리치니 주먹 자리와 손가락 자리가 생겼다고 하는 ‘장사바위’도 있다.

 

 
천주교 오야동공소는 가선대부 호조참판 한대호(1801~1864)의 정부인 김해김씨가 시댁의 어른들과 조카들을 설득하여 천주학에 전념하게 하면서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야동에는 인조 때 호조참의를 지낸 분이 낙향해 살면서 경주이씨가 대를 이어왔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새소리물소리’ 전통찻집이 있는데, 1923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6.25 때 UN군과 중공군이 번갈아 사용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 찻집은 영국 BBC가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찻집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최불암의 이야기 숲’에 안숙선 명창이 이곳에서 출연하는 등 여러 차례 방송에 소개된 바 있다.

 

 
오야동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인물이 있다.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최명길(崔鳴吉)의 아버지 최기남(崔起南, 1559~1619)이다. 최명길이 주화파가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가 명길에게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은 오로지 ‘和’ 한 글자뿐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영흥대도호부사 자리는 여진족의 암살위협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로 8명이나 부임을 회피했는데 아홉 번째로 임명된 최기남이 부임하여 점점 세력이 강성해지는 여진족을 상대하면서 장차 국난이 닥칠 것을 예견했던 것이다. 최기남의 묘가 오야동에 있다.

 

 
막상 1636년이 저물어 가는 엄동설한에 전쟁이 터졌을 때, 싸우자고 주장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종적을 감추었지만, 최명길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적장 용골대를 만나 정묘년(1627)에 형제 관계를 맺었는데 왜 침략해 왔느냐고 따지며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만들자 이를 본 67세의 예조판서 김상헌이 이 문서를 찢어 버리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명망 있는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소?" 그러자 최명길은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라고 했다.
 
결국 인조는 수달피로 만든 푸른색 청나라 군복을 입고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고 ‘군신관계’를 맹세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것은 필연적 결과였다.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인조는 반란이 두려워 군사 훈련을 금지했고, 강화도 함락으로 왕족들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에는 남한산성 안의 조선군사들이 행궁 앞으로 몰려가서 인조의 출성(出城)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이다. 민심이 떠나면 천심도 떠난다. 병자호란에는 의병조차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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