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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16. 자혜(慈惠)마을 은행동

 

천연자연물이 지명유래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이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은행2동 주민센터 뒤에 3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있어서 여름이면 정자나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은행정(銀杏亭)이라 불리며, 으능쟁이, 은행쟁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은행정, 논골, 금광리 등과 함께 광주군 중부면 단대리에 속해 있었다. 성남시 승격 이후 몇 차례 변화를 거쳐 1979년 9월에 은행동이 은행1동과 은행2동으로 나눠지고 , 은행2동은 1988년 7월에 다시 은행 2·3동으로 나뉘었다가 다음 해 수정구청이 생기면서 은행3동은 수정구 양지동이 됐다.
 
1969년부터 서울 철거민들의 강제이주가 시작된 ‘광주대단지 건설’ 사업은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첫째는 주거환경이 ‘난민촌’ 수준에 불과해 겨울에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고, 둘째는 일자리가 전혀 없는 황무지라서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웠다. 셋째는 부동산 투기로 땅값이 폭등하고 정부에서는 가혹한 세금 징수 등의 조치가 있었다. 이런 엄혹한 현실은 곧 폭발할 화약고나 다름없었고, 1971년 8월 10일 주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이 사건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으로서 존엄한 권리와 기본적인 생존권, 행복추구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당한 요구였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잘 모르고 있던 사실이 있다.


철거민 중에는 서울의 무허가 주택에 세를 들어 살던 사람들도 함께 이주 됐는데, 이들에게는 ‘딱지’라고 불리는 입주증이나 천막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광주대단지 안에서 무허가로 판잣집을 짓고 거주하다가 다시 강제 철거돼 정착한 곳이 ‘달나라 별나라’라고 불렸던 은행동 일대였다. 광주대단지의 무허가 판잣집은 5121채에 달했다.
 


금광2동과 은행동을 걷다 보면 ‘자혜로’라는 길 이름과 ‘자혜근린공원’을 만나게 된다. ‘자혜(慈惠)’라는 이름은 이 지역의 생생한 삶의 숨결과 역사를 품고 있다.


은행동 지역이 포함된 단대리 일대는 1990년대까지 ‘한성1·2·3지구’, "자혜지구" 등으로 불려 왔다. 한성2지구가 은행 2동, 자혜지구는 은행1동과 금광2동 일부이다.

 

자혜지구에는 광주대단지에서 철거된 주민 4300가구 2만여 명이 8평의 땅에 움막을 짓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식구들이 포개서 자야만 했다. 그 움막집이란 게 선사시대 사람들의 움집처럼 꼭대기가 뾰족하여 ‘삿갓집’이라고 불렀다. 또 재래식 변소 6개를 1만6000명이 공동 사용해야 했다.

 


1971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알몸월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런 처참한 생활상이 알려졌다. 은행동에는 당시 주민들이 사용했던 유료 우물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학교를 갈 수 없는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제일실업학교가 1971년 11월 11일 천막에서 시작됐고, 최규성 교장 등 연세대학교 학생 교사들이 학생들의 꿈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다.

 

태풍에 천막교실이 날아가서 학생들은 스스로 비탈을 깎고 가마니에 흙을 퍼 나르며 학교를 지었지만, 시유지 무허가 건축물이라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벽돌 한 장 마다 우리들 손끝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저 교실은 우리들의 몸과 같다"는 학생들의 애원을 듣고 철거반원들 조차 눈시울을 붉히며 되돌아갔다.

 

제일실업학교는 창세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배움을 갈망하는 이들의 등불이 되고 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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